34년간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해온 ‘국민 MC’ 송해가 8일 별세했다. 향년 95세.
경찰에 따르면 송씨는 이날 서울 도곡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송해 측은 “식사를 하러 오실 시간이 지나 인근에 사는 딸이 자택에 가보니 쓰러져 계셨다”고 전했다. 송씨 가족은 이날 오전 8시 22분쯤 소방당국 등에 신고했고, 출동한 소방대원이 자택 현장에서 사망을 확인했다.
송씨는 올해 들어 잦은 건강 문제로 병원을 찾아 팬들의 걱정을 샀다. 지난 1월에는 건강 문제로 입원 치료를 받았고, 지난 3월에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송씨는 지난달에도 건강 문제로 입원했고, 이 과정에서 출연 중이던 KBS 1TV ‘전국노래자랑’ 하차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권혁재 사람사진 – 송해
송씨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 대열에 섞여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는 1955년 창공악극단을 통해 데뷔했고, 1988년부터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해왔다. 무려 34년간 공개 녹화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1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현역 최고령 MC로 통했던 송씨는 지난달 영국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로 등재되기도 했다.
95세 평생 ‘딴따라’를 자처했다. 장수 프로 ‘전국노래자랑’을 34년간 진행하며 방방곡곡 서민들의 웃음과 눈물을 함께 했다. 악극단 시절부터 한류 열풍까지 한국 대중문화의 변천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영원한 현역 MC’ 였다.
2012년 방송 1505회를 앞두고 그는 ‘전국노래자랑’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이라고 했다. “매 회 할 때마다 ‘이게 내 첫 프로다’ 하는 기분으로 한다”면서 “출연자 하나하나 긴장 풀어드리고, 살아온 얘기 꺼내는, 노래자랑이자 토크쇼”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힘들고 그만 두고 싶었던 적이 왜 없겠어요. 정이라며 이만~한 배추김치를 싸서 내미는데 먹다가 목이 막힐 뻔도 하고. 그래도 그분들 무안하지 않게 하는 게 제 몫이죠. 제가 황해도 재령 출신인데, 남은 소원은 거기서 한번 해보는 겁니다.”
황해도 재령. 그리운 어머니를 두고 떠나온 곳.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와중에 혈혈단신 남하할 땐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이번에는 조심하거라” 하며 눈물짓던 어머니와 툇마루에 앉은 여동생이 23세 청년 송해 뇌리에 남은 마지막 모습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랑 길이 평생 그를 서민의 벗, 무대 위의 ‘광대’로 이끌었다.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시청자들과 격의없이 소통하고 어울렸던 송해씨. [중앙포토]
누가 뭐래도 방송인 송해와 한몸인 프로가 ‘전국노래자랑’이다. 1980년 11월 첫 전파를 탄 ‘전국노래자랑’ 마이크를 그가 넘겨받은 것은 61세였던 88년. 그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스무살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를 공개무대 현장으로 끌어들인 이가 배우 안성기의 친형이기도 한 안인기 KBS PD다.
고인은 PD 출신이자 영화제작자였던 그의 부친과 오랜 마작 친구 사이였다. 88년 5월 경상북도 성주 편을 시작으로 91년 몸이 좋지 않아 6개월 쉰 것과 말년을 제외하곤 녹화에 불참한 적이 없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외에도 다른 예능 프로그램과 각종 광고에 출연하고, 드라마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2011년에는 전국을 돌며 단독 콘서트를 열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으며 12장의 앨범을 냈을 정도로 출중한 노래실력을 자랑했다.
올해 1월 설연휴 송해의 인생사를 담은 트로트 뮤지컬로 선보인 KBS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에서는 ‘내 인생 딩동댕’ 등을 부르며 시청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타고난 성실성과 무서울 정도의 프로의식이 바탕이지만 그걸 지켜준 게 강인한 체력 관리다. 소위 BMW 즉 버스(Bus)‧지하철(Metro)‧걷기(Walk) 등 대중교통만 이용했다. 지방 공연 때도 전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KTX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기획사나 로드매니저, 코디도 두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매일 냉온탕을 번갈아 한 것도 남다른 건강관리 비법이다. ‘전국노래자랑’ 녹화 때도 하루 전 미리 내려가 그 지역 목욕탕에서 사람들과 담소 나누기를 즐겼다. “현지 분위기를 파악해야 더 잘 소통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다.
덕분에 노년에도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웬만한 장정들이 술 대결을 하다 먼저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그러다 2019년 말 폐렴으로 입원한 데 이어 지난 9월 중순 7㎏이 빠진 해쓱한 모습을 보이면서 건강 우려를 샀다. 올 3월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어보고 싶다 했던 소원도 분단 77년의 한과 함께 스러졌다.
원로배우 신영균씨가 2019년 12월 16일 한국영화인원로회 송년모임에서 국민MC 송해씨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정호 기자
고인은 1927년 4월27일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토현리에서 송제근과 박신자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송복희.
오민석 단국대 교수(시인‧문학평론가)가 펴낸 『나는 딴따라다 – 송해평전』(스튜디오본프리, 2015)에 따르면 부친은 숙박업체와 주막을 운영했는데 일터 따라 가족이 자주 이사했다고 한다. 재령군으로 옮긴 것은 고인이 초등학교 다닐 때다. 그가 전쟁통에 징집을 피해 고향을 떠났을 땐 가족 중 어머니와 8~9세 연상의 형님, 7~8세 연하의 여동생만 생존해 있었다.
송해라는 이름은 연평도에서 구사일생 탑승한 유엔군 상륙선에서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함께 배를 탄 약 3000명의 전쟁 난민들은 안남미를 바닷물에 지어 먹으며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송해는 함상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떠올렸다. 그는 바다 해(海) 자를 따서 마음 속으로 자신을 송해라고 불러보았다.”(같은 책 77쪽)
3일 밤낮 항해 끝에 배는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에서 생존 분투가 시작됐다. 전쟁통이라 군 입대를 통해 생계를 해결했다. 육군 통신학교에 배정돼 혹독한 무선 훈련을 거쳤다.
고인은 1953년 7월27일 모스 부호로 전군에 휴전협정 조인을 알린 최초 군인들 중 한명이다. 이 기간 군예대 활동도 했다. 북한에서 해주음악전문학교(성악과)에 다닌 게 보탬이 됐다. 3년 8개월간 군복무를 마치고 54년 8월 제대했다.
1977년 송해의 연기생활 27주년 기념 대공연 포스터. [사진제공 스튜디오 본프리]
직업적 예인의 시작은 창공악극단이다. 1951년 창립된 창공악극단에 28세이던 55년 무작정 찾아가 입단했다. 악극 공연과 함께 노래‧댄스 등으로 구성된 버라이어티쇼를 공개 무대에서 펼치면서 사회자(MC)로서 감을 익혔다.
1960년대 초반 대중문화의 중심이 극장무대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으로 급격히 선회할 즈음 자신도 방송계로 발길을 옮겼다. 악극단 시절 재치 있는 만담을 눈여겨본 방송계 인사들 덕이었다.
데뷔무대는 동아방송의 ‘스무 고개’. 라디오 최고 인기 퀴즈프로그램으로 고인은 코미디언 박시명과 콤비를 이뤄 퀴즈쇼 막간 콩트를 했다. 이들 콤비는 뒤이어 고 임택근 아나운서가 진행한 MBC 라디오 ‘오색의 화원’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1964년쯤 송해는 구봉서‧배삼룡‧박시명 등과 함께 MBC와 월 약 2만원에 전속 계약을 했는데 당시로선 파격 대우다. ‘웃으면 복이 와요’ 등 코미디 프로를 통해 희극인 끼를 과시했다.
잘 나가던 그가 전국구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은 1974년 시작한 KBS 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를 통해서다. 앞서 동아방송 ‘나는 모범운전사’로 시작된 교통방송에서 그는 운전자들의 애환을 시시각각 전달하며 구수한 입담을 과시했다.
아들 사망사고로 인한 실의에 빠져 하차할 때까지 ‘송 기사’라는 애칭 속에 14년 간 하루도 어기지 않고 방송을 진행했다. 아들 장례식장에 서울 시내 모든 운전기사들이 다 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앞서 그가 한국 최초 여성 MC였던 이순주와 콤비로 73년 시작한 ‘싱글벙글쇼’ 역시 지금까지 40여년 지속되는 MBC 라디오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사랑받고 있다.
어느 날 식당에서 한국 코미디언의 대부들. 가운데가 송해, 왼쪽이 구봉서, 오른쪽이 배삼룡이다. [사진제공 스튜디오 본프리]
송해 오른쪽에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가 있다. [사진제공 스튜디오 본프리]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모든 이들을 격의 없이 대하는 그의 인품이 제대로 발현된 무대가 88년 맡은 ‘전국노래자랑’이다.
난생 처음 TV에 나오는 출연자들이 고인의 주름진 웃음과 구성진 말솜씨에 끌려 갖은 끼를 풀어놓았다. 때로 정겹고 때로 우스꽝스럽고, 자주 가슴 찡한 대화가 오갔다. 고인은 이들이 챙겨온 음식을 나눠먹고 노래와 춤을 어울려 췄다.
반주를 맡은 악단장이나 카메라 감독까지 무대로 끌어들이는 것도 예사였다. 리얼 버라이어티란 장르가 굳혀지기 전부터 고인은 무대 안팎을 넘나들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악극단 출신인 고인은 앨범을 여러 장 낸 가수이기도 하다. 1987년 ‘백마야 우지 마라’ ‘아주까리 등불’ ‘애수의 소야곡’ 등 1세대 가요를 모아 ‘송해 옛노래 1집’이라는 타이틀로 첫 음반을 냈다.
이후 2003년부터 2006년에 걸쳐 ‘애창가요 모음집 송해송’이라는 제목으로 연속 음반을 냈다. 오 교수의 평전에 따르면 고인은 이 6장의 앨범에 실린 108곡의 취입을 단 이틀만에 끝냈다고 한다. 평소 100여곡의 ‘뽕짝’ 가사를 외울 정도의 비상한 암기력 덕분이다.
84세인 2011년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라는 투어 공연도 벌였다. 2013년까지 햇수로 3년 간 전국 18개 지역에서 총 42회 공연의 거의 전석이 매진됐다. 2015년 초엔 8집 싱글앨범 ‘유랑 청춘’을 통해 신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해 세종문화회관에서 ‘희극인 첫 공연’이라는 이정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평양노래자랑을 함께 진행한 송해와 북한의 전성희 아나운서. [사진제공 스튜디오 본프리]
고인은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를 평생 그리워했다. 한번은 소식을 물을 기회도 있었다. 남북관계 해빙기였던 2003년 8월 11일 평양 모란봉 공원 야외무대 ‘전국노래자랑’이 열렸을 때다.
생이별한 모친과 누이가 살아 있다면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있을 터였다. 주변에서 연락해보라는 권고도 했지만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행여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그의 평전을 쓴 오민석 시인‧문학평론가는 전했다.
고인은 평생 ‘딴따라’를 자처했고 대중문화예술인이란 데 자부심을 가졌다. 2003년 김대중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받았을 때 수상소감이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였다. 2015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땐 “대한민국 대중문화 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생전 그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송해 1927’(감독 윤재호)이 2020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선보였다.
60여년을 해로한 부인 석옥이 여사를 2018년 1월 지병으로 먼저 보냈다. 고인은 부인 고향인 대구 달성군에 부부가 함께 그곳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생전에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달성군은 송해공원을 조성했으며 지난해 12월 ‘송해 기념관’을 개관했다.
아들은 1994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유족으로 두 딸과 손주들이 있다.
연합뉴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