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 동서고금에 거의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세상의 빛이 되었던 영웅들이 내 성장에 불을 지폈다. 특히 여러 분야에서 특출하게 활약해서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나도 훗날 무엇인가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한 몫을 하면 세상도 더 좋은 환경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사회질서에 길들여지면서 위대한 위인들은 내 의식 밖으로 밀려나고 나는 내가 일군 작은 우주에서 버둥거렸다. 내 우주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나에게 다양한 영향을 주었고 나는 내속에 형성된 완벽한 인간상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참 열심히 애썼다. 누군가의 모범이 되기 보다는 그저 나 한사람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며 살았다. 전문 학위를 받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던 공부를 했고 틈틈이 지역 단체에 자원봉사도 많이 하며 앞을 보고 달렸지만 내가 구하던 완벽한 인간상의 근처도 못갔다.
그러다가 막상 모든 일에서 은퇴하고 내 일상의 주인이 되어서 나를 관리하니 그동안 내가 추구했던 허상에서 벗어났다. 신기루를 쫓던 삶에서 실체를 찾는 자세가 되었다. 살면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던 소소한 일들이 바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적이고 축복임을 알게됐다. 그때부터 고은 시인의 시 ‘그 꽃’ 이 내 속에 머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얼마나 멋진 증언인가.
2000년도 봄이었다. 하버드대학가의 한 찻집에서 고은 시인을 만났다. 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공부하던 딸의 강의실에 한국에서 시인이 왔다며 딸이 우리의 만남을 주선했다. 찻잔을 마주하고 앉아서 한국문학에 지식이 짧은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와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는 즐겨 읊지만 정작 고은 시인의 작품은 아는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인사했다. 하지만 그는 이민생활 오래 했어도 모국 시인들의 시를 기억하고 있는 나를 좋아했다. 시를 쓰는 딸이 고은 시인의 작품에 가진 질문을 중간에서 통역해주며 나도 조금씩 그의 작품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그후 그의 근황을 관심 갖고 따르다가 2018년 그가 미투 운동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순수문학을 한다고 믿었던 시인이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나약한 인간의 허술함을 보여줬다는 뉴스에 실망은 했지만 시인은 밉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쉬운 언어들로 쓴 짧고 아름다운 시를 사랑하는 마음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같은 미투 운동으로 수난을 받았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의 음악을 즐겨 듣는 것과 같다. 자신의 예술에 열정적인 아티스트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먼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지인들이 요즈음 더 화끈한 느낌을 준다. 윤리 도덕은 동서양 누구나의 기본이며 그 바탕에 어떤 집을 짓느냐? 에 따라 그 사람의 진가가 들어나고 그리고 훗날 어떤 뒷모습을 남기고 세상을 떠날 지 상상하게 된다. 특출하게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요즘 나의 위인들이다. 주말에 파머스 마켓에서 산 맛있는 복숭아를 나누어 먹으려고 이웃집에 들렀다가 듣지 못하고 말 하지도 못하는 80대 장애인 할머니가 뉴욕으로 인턴쉽을 떠나는 손주의 셔츠를 정성스레 다림질하는 모습을 봤다. 기도하는 여인의 자세에는 사랑과 행복이 있었다. 가끔 텍스트로 대화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미소로 서로의 건재를 나눈다. 이렇게 자신의 일상에서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삶이 소중한 것이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다가온다. 남부의 뜨겁고 후덥지근한 긴 여름이 좋다. 신선한 새벽은 새벽대로 후끈한 오후는 화끈한 에너지가 되어서 나에게 활력을 준다.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고향을 지키며 사는 친구 보다 더 남부 날씨에 잘 적응하며 매일 감사한다. 내가 있어서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라 믿는 딸들의 마음에 나는 강한 충동으로 존재하고 있음에 솔직히 이 땅에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