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아닌 구별’ 논리 내세워
노예 해방 후에도 계속 핍박
버스 보이콧, 워싱턴 행진 등
1960년대 거쳐 평등권 ‘결실’
6월 19일은 흑인노예해방기념일, 준틴스다. 2021년부터 연방공휴일이 됐다. 준틴스(Juneteens)란 6월(June)과 19일(Nineteenth)을 합친 말이다.
일찍이 링컨 대통령은 1963년 1월 1일을 기해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의 전체 흑인 노예가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는 2년 6개월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남부연합 소속이었던 텍사스 주가 여전히 노예제를 계속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5년 6월 19일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연방군이 텍사스의 항구도시 갤버스턴에 상륙한 날이다. 2000여 명의 연방군과 함께 텍사스를 점령한 고든 그레인저 장군은 이렇게 선포했다. “전쟁은 끝났다. 모든 노예는 자유다.” 아직 전쟁이 끝난 줄도, 노예 해방 선언이 있었던 줄도 몰랐던 25만 텍사스 흑인 노예들은 그제야 비로소 해방됐다.
이듬해부터 흑인 사회는 이날을 ‘독립기념일’처럼 성대히 기념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날은 흑인들만의 명절이었다. 적어도 2021년 연방공휴일 제정 전까지는 그랬다. 그 이면엔 깊고도 질긴 인종 갈등의 뿌리가 있었다.
#. 계속된 흑백분리 정책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이후 100년이 지나도록 미국은 여전히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세상이었다. 유색 인종의 지위는 여전히 2등 국민에 머물러 있었다. 흑인은 투표권이 있었지만 실제 투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남부 여러 주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흑인의 투표권 행사를 방해했다.
문맹검사(Literacy test)를 도입해 헌법을 해독하고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험까지 보게 했다. 시험지엔 비누 거품 속 물방울이 몇 개인지를 묻는 황당한 문항도 있었다. 사실상 투표를 못 하게 한 것이다.
흑백분리 정책(Segregation)도 공공연히 자행됐다. 이른바 짐 크로법(Jim Crow Laws)에 따라 흑인은 백인과는 다른 학교에 다녀야 했고 열차, 식당, 호텔 등의 출입도 제한됐다. 공원 수도꼭지도 흑백이 분리되어 있었고 공공 화장실 역시 유색인종(Colored)이라고 쓰인 것만 사용해야 했다.
1938년 4월, 노스캐롤라이나주 핼리팩스 카운티 법원 잔디밭의 ‘컬러’ 용 식수대. @libraryofcongress 조던 J. 로이드 채색
근거는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이었다. 이는 흑백 혼혈이었던 호머 플레시가 백인 전용 일등석 객차에 탔다가 체포된 후 제기한 소송에서 시작됐다. 결국 당시 퍼거슨 판사가 있던 루이지애나 법원은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일 뿐”이라며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흑인에게 시민권을 주고 투표권을 부여했던 수정헌법 14조, 15조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도 남부 중심으로 ‘합법적인 흑인 차별’이 만연했던 것은 이 판결의 영향이었다.
1939년 10월 미시시피 주 벨조니에 있는 영화관의 ‘컬러’ 입구로 들어가는 흑인. @libraryofcongress 조던 J. 로이드 채색
그래도 변화의 바람은 거스를 수 없었다. 1951년 캔자스주 토피카에 8살 흑인 소녀 린다 브라운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흑백분리 정책에 따라 집 바로 근처 학교를 두고도 1마일이나 떨어진 흑인 학교를 날마다 걸어서 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은 전학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유명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소송의 시작이었다.
소송은 3년만인 1954년 5월 마침내 ‘공립학교의 흑백 분리는 명백한 위헌’이라는 판결로 끝이 났다. 이는 60년 가까이 미국 사회를 지배해 온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뒤집은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이제 흑백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남부의 학교들은 여전히 흑인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0년대 말까지도 흑백 통합학교에 다니는 흑인 학생은 1%가 되지 못했다.
1957년 아칸소주 리틀록에선 흑인 학생 9명이 백인 중심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 했지만, 주지사는 군대를 동원해서까지 이들을 막았다. 9명 학생들은 온갖 멸시 수모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견뎌냈다. 이들 ‘리틀록 9인’은 52년 뒤, 2009년 흑인 첫 대통령 버락 오바마 취임식에 초청받는 영광을 누렸다.
#. 로사 파크스 & 마틴 루터 킹
이 무렵 흑인 젊은이들은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 앉아 주문하는 ‘싯인(Sit in)운동’을 펼치며 차별에 항거했다. 더 결정적인 사건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일어났다.
1955년 12월 1일 흑인 여성 재봉사 로사 파크스(사진, Rosa Parks, 1913~2005)가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이다.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로사 파크스를 지지하며 흑백차별 철폐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흑인들의 버스 승차 거부 운동도 이어졌다.
운동의 중심엔 26세의 젊은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 있었다. 킹 목사는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함께 381일간 버스 안타기 운동을 전개하며 차별에 항거했다.
1년 뒤 연방 대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로사 파크스라는 한 여성의 용기 있는 행동은 민권운동의 선구가 됐다.
로사 파크스가 버스를 기다리던 몽고메리 정류장에는 그의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역시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바탕을 둔 평화적 인권운동을 이끌며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63년 6월, 케네디 대통령은 흑인에 대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차별 철폐를 규정한 새로운 민권법을 제안했다. 남부 여러 주는 필사적으로 법안 저지에 나섰다. 민권운동가들은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대규모 ‘워싱턴 행진’을 기획했다.
1963년 8월28일 워싱턴 행진에 나선 민권운동 리더들과 군중들.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조던 J. 로이드 채색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엔 25만 명이 모였다. 그들 앞에서 킹 목사가 ‘아이 해브 어 드림(I have a dream)’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네 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그의 연설은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연설로 기록됐다.
1963년 8월28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DC에 모인 25만 청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 행진 중의 마틴루터킹 주니어 목사와 매튜 아만(왼쪽 두번째)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조던 J. 로이드 채색
워싱턴 행진과 킹 목사의 연설 이후, 케네디를 계승한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마침내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에 서명했다. 이로써 미국에선 더 이상 인종, 민족, 출신 국가, 종교와 성별에 따른 차이로 차별할 수가 없게 됐다.
1965년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도 통과됐다. 이로써 피부색에 따른 투표권 제한도 철폐됐다. 이후 흑인 투표율은 70% 이상으로 치솟았다.
흑인 정치 지도자들이 잇따라 배출되었고 흑인의 삶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2008년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당선이었다.
1964년 11월 3일, 워싱턴 DC 카르도조 하이스쿨에서 진행된 흑인 투표. @libraryofcongress 조던 J. 로이드 채색
미국 민권 운동의 상징이자 기수였던 킹 목사는 1964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그해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하지만 1968년 암살당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그의 생일을 기념해 1986년부터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했다. 개인의 탄생일이 연방 공휴일이 된 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였다.
21세기가 되고도 20여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인종차별 문제는 여전히 미국 사회의 아킬레스건으로 남아 있다. 피부색과 성별 등 일체의 조건과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법적, 제도적으로 평등하다는 ‘민권’은 확립됐지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똑같은 상황에서 유색인종이 겪어야 하는 불이익은 통계적으로도 뚜렷이 입증된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는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의 확산은 이런 상황에 대한 흑인사회의 또 다른 저항이었다.
2020년 6월6일, 워싱턴에서 열린 ‘BlackLivesMatter’ 시위에 참여한 다인종 시민들이 함께 행진하고 있다. @clay.banks via Unsplash
그런 점에서 준틴스의 연방공휴일 제정이 시사하는 의미는 크다. 미국 사회가 다시 한 번 사과와 배려, 용서와 화해, 나아가 인류 이상인 ‘더불어 살기’를 향한 또 하나의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민권운동 관련 주요 연표
– 1862년 : 링컨 대통령 노예해방선언
– 1866년 : 수정헌법 14조 비준(흑인에게도 시민권 인정)
– 1870년 : 수정헌법 15조 통과(흑인에게도 투표권 부여)
– 1896년 :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판결 (흑백 차별은 구별일 뿐 위헌이 아님을 인정)
– 1920년 : 수정헌법 19조 발효(여성 참정권 인정)
– 1954년 :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공립학교의 흑백 분리 위헌 판결)
– 1955년 : 앨라배마 몽고메리 카운티서 로사 파크스 체포. 흑인들 버스 보이콧 운동 전개.
– 1956년 : 연방대법원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 판결
– 1957년 : 아칸소 리틀록 9명의 흑인 학생 센트럴고교 등교 시위
– 1961년 : 프리덤 라이더 운동(민권운동가와 대학생들이 흑백 분리 반대를 위해 장거리 버스를 타고 남부지역 순회)
– 1963년 : 워싱턴 행진, 마틴 루터 킹 목사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연설
– 1964년 : 민권법 제정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국가에 따른 일체의 차별 철폐)
– 1965년 : 투표권법 제정 (피부색에 따른 투표 자격 제한 일체 금지)
– 1968년 : 마틴 루터 킹 목사 피살
– 1986년 : 마틴 루터 킹 데이 연방공휴일 제정
– 2008년 : 최초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당선
– 2021년 : 흑인노예해방 기념일 ‘준틴스’ 연방공휴일 제정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 인종 차별을 종식하려고 노력한 것은 무슨 운동인가?(What movement tried to end racial discrimination?)
답.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
문.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무슨 일을 했는가?(What did Martin Luther King, Jr. do?)
답. 민권을 위해 투쟁함(Fought for civil rights) / 모든 미국인의 평등을 위해 노력함(Worked for equality for all Americans)
앨라배마주 버밍햄 도심의 켈리 인그램 공원에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