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특히 이민 1.5세, 2세들에게 중요한 이슈가 정체성(Identity)이다. 이민 1세대는 물론 그 자녀, 손주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정체성은 한마디로 내가 누구고,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라는 명제다. 이는 서로 연결된 인간관계 속에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
정체성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생물학적 정체성은 얼굴을 중심으로 한 신체적 표현이고, 사회적 정체성은 물질의 소유와 사회적 지위의 역할을 뜻하며, 심리적 정체성은 우리가 자라고 배우면서 경험한 내면의 변화를 의미한다.
정체성은 우리 삶의 주기와 함께 발달한다. 특히 심리적 정체성은 삶의 주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심리적 정체성 발달의 가장 밑거름이 되는 첫 번째 심리 특성은 믿음이다. 주로 생후 한 살 전 후의 영아기에 이루어진다. 태어난 후 탯줄이 떨어져 신체적으로 엄마와 분리된 때도 엄마나 양육자가 잘 보살펴주면 마음이 편안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 믿게 된다.
두 번째 과정은 3살 전 후의 걸음마 시기에 생기는 자율성이다. 이 시기에 말도 조금은 하고 대소변을 가릴 줄 알게 된 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생긴다.
그러다 4-6세 경 초기 아동기가 되면 남자 아이의 경우 이성 부모인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데 자기 보다 강한 아빠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와 싸우면 질게 뻔해 경쟁자 관계에서 강한 아빠처럼 되고 싶은 동일화 과정으로 옮겨가는 타협을 한다. 프로이드는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불렀다.
그 후 13세 쯤 사춘기가 되면 아이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심리적 혼란을 겪으며 부모로부터의 독립과 의존 사이에서 방황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후퇴냐 전진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힘든 시기를 넘어야 심리적 정체성 발달이 거의 끝이 난다. 그 뒤의 삶의 시기는 심리적 정체성 발달에 그리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상을 요약하면 심리적 정체성 발달 과정은 믿음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자율성, 자신감, 동일화, 타협을 쌓아 놓은 후, 혼란과 방황 속에서 선택의 기로를 잘 택하면 튼튼한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환자 진료하고 주위 사람들과 만나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에서 자녀들이 건강한 정체성 발달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건강한 가족과 가족 간의 소통인 것을 알았다. 엄마, 아빠는 가족을 잘 지켜주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주 소통해야한다. 한국 말 잘 못하는 자녀의 문제점들에 대해 물어보고, 듣고, 이해하려면 최소한의 영어가 필요하다. 힘들겠지만 틈을 내어 영어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 자식들한테 무시도 덜 당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음식점에서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다. 또한 자녀들의 과외활동에 라이드(Ride)만 해주지 말고 경기나 연습을 지켜보는 습관도 길러야 한다. 다른 학생들의 학부모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자녀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부모라는 인상도 준다.
인간은 한계의 덫에 걸린 유한함의 숙명을 지닌 존재다. 상상도 할 수 없이 거대한 무한함의 우주를 창조한 초월자나 신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자녀들에게 마련해 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성공한 자녀에게는 오만하지 않는 겸손한 태도, 좌절한 자녀에게는 위안과 재기의 힘을 길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와 동포사회는 자녀들이 튼튼한 정체성을 가지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주류 사회에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다 아는 말이지만 내가 누구고,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은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잣대가 아닌 나의 결정에 달려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한 마음과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모두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 열심히 하는 이민자들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