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철길 주변 부지 재개발
25년 프로젝트 ‘일부 개통’
주변 상가 생기고 사람 몰려
공원, 예술작품 감상도 재미
#. 걷기 좋은 도시가 명품 도시다. 얼마나 걷기 좋은가가 현대 도시의 경쟁력이다. 세계 주요 도시들이 다투어 걷기 공간 확보에 나서고 있는 이유다. 시민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보 친화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최우선 도시 정책이 됐다. 지금 애틀랜타도 그 대열에 동참해 있다. 도심 순환 산책로 ‘애틀랜타 벨트라인(Atlanta BeltLine)’은 그 생생한 현장이다.
재작년 애틀랜타에 왔을 때 처음 벨트라인 이야기를 들었다. 걷기 좋아하는 나를 잘 아는 어떤 선배의 추천이었다. “애틀랜타 도심 외곽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연결한 트레일이 있어. 10여 년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반쯤 완공됐지. 다 연결하면 22마일인가 그래. 애틀랜타 살게 됐으니 한 번은 걸어봐야 하지 않겠어?”
그 말을 마음에 새겼지만 2년이 돼가도록 가 보지 못했다. 둘루스에 살다 보니 다른 걷기 좋은 곳도 많은데 굳이 애틀랜타 시내까지 나가 걸을 일이 없어서였다. 그렇게 미뤄오다 마침내 지난 주말 벨트라인 일부를 걸었다. 산을 걸을 때, 숲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먼저 벨트라인이 어떤 곳인지부터 소개한다.
애틀랜타 벨트라인. 트레일 곳곳에 벽화와 낙서그림(Graffiti)들이 있다
# 애틀랜타 벨트라인은 현재진형형인 초대형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다. 2006년 7월 착공했다. 최종 완공까지는 25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완공 후엔 전체 22마일의 도심 순환 트레일이 생긴다. 주변 연결망까지 합치면 33마일에 이른다. 이미 반 이상이 완공됐다.
벨트라인은 시멘트 포장 산책로다. 일부 트레일은 아직 비포장이지만 걸을 수는 있다. 걷기 뿐 아니라 자전거, 보드도 탈 수 있고 유모차나 휠체어를 밀고 걸을 수도 있다. 주변 공원과 상가 식당 등과도 연결된다. 주변엔 아파트나 주택 등 새로운 주거 공간도 들어선다. 벨트라인에 접근하기 쉽도록 경전철, 노면 전차 등의 교통 연결편도 함께 추진된다.
시작은 1999년 조지아텍의 한 대학원생의 석사 논문에서였다. 라이언 그래블(Ryan Gravel)이라는 학생이었다. 그는 애틀랜타의 고질적인 교통체증이 차량 중심의 이동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주장을 담아 논문을 썼다. 더는 사용하지 않는 옛 철길과 주변 부지를 활용해 도심 순환 산책로를 조성하고, 노면 전차 노선 및 경전철 역 건설, 문화 공간 조성, 공공주택 건립 등을 통해 애틀랜타 주변 지역을 균형있게 발전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
한 젊은이의 꿈이었을 뿐인 벨트라인 구상은 2002년, 실현 가능한 현실로 떠올랐다. 당시 애틀랜타 시장으로 새로 당선된 셜리 프랭클린(Shirley Franklin) 시장이 주목했다. 높은 실업률과 빈부 격차, 그리고 인종 간 분리로 골머리를 앓던 애틀랜타 시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 본 것이다. 벨트라인 프로젝트는 애틀랜타 시의 공식 의제가 됐다. 그리고 2006년 마침내 첫 삽을 떴다.
각 구간별로 트레일이 하나씩 완공되어 갔다. 2010년 노스사이드(Northside), 2012년 이스트사이드(Eastside), 2017년에 웨스트사이드(Westside) 트레일이 차례로 오픈했다. 16년이 지난 2022년 현재 프로젝트는 일단 성공적이다. 유력 지역 언론인 애틀랜타 비즈니스 크로니클(ABC)은 2020년 3월의 한 특집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애틀랜타 벨트라인은 오랫동안 방치된 애틀랜타 도심의 저소득 지역 재개발 사업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다.” ABC는 이어 “2019년 한 해 동안 애틀랜타 벨트라인의 경제적 효과가 60억 달러를 넘었다”며 “주변 상권 활성화로 수많은 고급 인력들이 벨트라인으로 흡수되었으며, 주변 상권과 주택가 역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그늘도 있다. 벨트라인 주변 상권이 살아나면서 집값도 함께 뛰었다. 본래 살던 사람들은 치솟는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벨트라인 밖으로 더 밀려나게 되었다. 지역 격차 해소와 저소득층 지역의 주거 환경, 생활 환경 개선을 목적으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무색했다. 결과적으로 벨트라인은 도시를 아름답게는 하고 있지만 원주민들은 떠나야 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현장이 되었다.
#. 그럼에도 애틀랜타 벨트라인 자체만 보면, 걷고 즐기고 누리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보다 자연 친화적이며 역사와 전통이 흐르고 인문학적 유산이 어울려 숨 쉬는 미래 도시의 싹이 이곳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벨트라인 동쪽 구간인 이스트사이드 트레일은 이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코스다.
벨트라인은 옛 철길 주변을 재개발한 산책로다. 이스트사이드 트레일에 남아 있는 옛 철길.
옛 철길과 주변 부지를 재개발한 이스트사이드 트레일은 애틀랜타 미드타운 피드몬트 공원 공원(Piedmont Park) 끝에서 레이널스타운(Reynoldstown)까지 이어지는 약 3마일 구간이다. 한해 이곳을 걷는 사람만 200만 명에 이른다.
피드몬트 공원 끝 말고도 폰스시티마켓(Ponce City Market)과 디캡 애비뉴와 크로그 스트릿(Krog Street NE) 만나는 곳 등 세 곳이 큰 출입구다. 그밖에 트레일 인접 동네에서도 들어갈 수 있는 길이 곳곳에 있다.
지난 주말 이곳을 걸었다. 그 전에 먼저 피드몬트 공원을 찾았다. 주차도 할 겸, 애틀랜타의 센트럴파크로 불리는 대표적 도심 공원도 둘러볼 겸 해서였다.
애틀랜타 최대 도심 공원 피드몬트 공원 전경.
소문대로 공원은 넓고 예뻤다. 호수가 있고 나무가 많고 물 위에 비친 도심 고층 건물도 그림엽서 같았다. 이른 오전 시간임에도 한가로이 앉아 쉬는 사람, 땀 흘려 달리는 사람,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그려내는 평화로운 풍경이 말 그대로 애틀랜타 시민 낙원 같았다.
트레일 진입로마다 벨트라인 트레일 규칙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이스트사이드 트레일은 공원 남쪽을 벗어나 길 건너로 바로 이어졌다. 이곳은 더 활기찼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람들의 상기된 표정에서 젊은 도시의 맥박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벨트라인은 사람과 자전거가 함께 하는 트레일이다.
길은 깨끗했고 곳곳에 벨트라인 에티킷 안내 게시판이 보여 당국이 얼마나 관리에 신경 쓰고 있는지 느껴졌다. 보행자 안전을 위한 보안 카메라도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이스트사이드 트레일 주변에 새로 건축되고 있는 공동주택. 1,2,3베드룸이 있고 가격은 40만불대부터라는 광고판이 붙어 있다.
예쁜 카페, 멋진 식당, 쾌적한 오피스 빌딩, 한창 짓고 있는 공동주택들 사이로 트레일은 계속 이어졌다. 중간중간 만나는 벽화와 설치 미술 작품을 보는 눈 호강도 큰 즐거움이었다. 전 구간이 완공되면 모두 450여 개의 설치미술, 벽화 등이 전시된다고 하니 그때는 벨트라인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 될 것 같다.
트레일 주변에는 이런 카페와 가게들도 많다.
한 시간 남짓 걸어 히스토릭 포스 워드 공원(Historic Fourth Ward Park)에서 땀을 식혔다. 조금 더 걸어 프리덤파크 트레일(Freedom Park Trail) 만나는 곳까지 갔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센터가 있는 프리덤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걸은 거리를 보니 2마일 정도였다. 트레일은 아직 1마일쯤 더 남았지만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오는 길에 지나쳐 온 폰스 시티 마켓(Ponce City Market)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정면에서 바라본 폰스시티마켓. 젊은 감각으로 새롭게 꾸며진 애틀랜타 쇼핑 명소다.
폰스 시티 마켓은 옛날 공장 건물을 상가로 리모델링한, 애틀랜타 젊은 세대의 핫플레이스다. 다양한 맛집이 있고 재미난 쇼핑 거리도 많다. 최근엔 한국식 길거리 음식 매장이 들어섰다 해서 한인 신문에도 크게 소개됐다. 사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구경하는 재미가 컸다.
폰스시티마켓에 새로 들어서 한국 길거리 음식점 ‘우산바’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흘렀다. 다시 차를 세워둔 피드몬트 공원으로 돌아왔다. 피곤했다. 다리도 뻐근했다. 하지만 걷고 난 뒤의 피곤함은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한 뒤에 느끼는 피곤함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 좋은 피로감이다. 그런 날은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진다. 그날 밤도 그랬다.
철거된 철로와 철도 잔해를 이용해 만든 조형물. 벨트라인 곳곳에 이런 설치 미술작품들이 세워져 있다.
애틀랜타 벨트라인, 도심 가까이 살지 않으면 별로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변 생활자들에겐 이만한 오아시스가 없을 것 같다. 누가 애틀랜타를 찾아와도 차 태워 멀리 나들이만 할 게 아니라 이런 도심 트레일 걷는 것도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 마침 올 여름 멀리서 친구가 온다하니 그때 함께 또 걸어봐야겠다.
벨트라인 상세 지도 (2022년 현재)
# 메모 : 이스트사이드 트레일은 애틀랜타의 센트럴파크라 불리는 피드몬트 공원을 거쳐가면 일거양득이다. 길거리 주차도 가능하지만 처음 방문자라면 안전하고 편한 피드몬드 공영 주차장(1320 Monroe Drive, Atlanta, GA 30306)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공원 입장료는 없고 주차비만 내면 된다. 폰스시티마켓( 675 Ponce De Leon Ave NE, Atlanta, GA 30308)을 통해서도 벨트라인 트레일을 걸을 수 있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