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터지자 우리 가족은 7월 15일에 봇짐을 싸서 마을에서 60여 리 떨어진 깊은 산간 마을로 피란을 갔다.
그 마을 앞에는 원통산아라는 조금 높은 산이 있었다. 밤이면 그 산을 향하여 아군의 포격이 지속되었다.
포탄이 원통산에 떨어져 폭발하면 대낮같이 밝았다. 포탄이 그 마을 상공을 지날 때는 쉬이익 하는 무서운 쇳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러다가 마을 근처의 논밭에 떨어져 폭발하면 굉음을 내며 파편이 집 지붕에 떨어질 때도 있었다.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방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만약 논밭이 아니고 마을에 포탄이 떨어지면 꼼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보름이 넘도록 밤마다 계속되었다. 피란이 아니라 전쟁 마중 나온 기분이었다.
그러다 8월 초 쯤 이 마을도 인민군이 장악하였다. 이제는 그 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계속 남으로 피란 가 봐야 전쟁 마중 나가는 꼴이라 판단하였다.
우리 가족은 짐을 꾸려 집까지 다시 걸어서 돌아왔다. 걸을 땐 누군가가 길 한가운데로 걸어야 한다고 하였다. 길가에는 지뢰가 매설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겁에 질려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 전쟁의 흔적이 역력했다. 포탄 피가 아무렇게나 산재해 있었다. 길가 어느 초가 지붕에는 암소 한 마리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피란을 가다가 지뢰를 밟아서 폭파되면서 그 힘에 휙 날려 지붕에 떨어진 것이라 하였다.
인민군 주력부대는 낙동강을 가운데 놓고 아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미 점령한 후방엔 인민군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아이들은 날마다 모여 전쟁놀이로 하루를 보냈다. M1 소총, 카빈총, 딱 공통, 따발총과 탄약이 남아있는 곳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마을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더없이 좋았다.
하루는 집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불당골이란 곳으로 마을 아이들 일곱 명이 버리고 간 무기를 찾아 나섰다. 엄청난 산골이었다. 나보다 두 살 위 형과 내 바로 밑의 동생도 함께 갔다.
천천히 골짝으로 들어서니 엄청나게 큰 말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전투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새까만 병사가 소나무 밑에 철모를 쓴 채로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섬뜩하고 무서웠다.
그 흑인 병사는 M1 소총을 끼고 죽어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부패하지 않고 팔은 바짝 말라 있었다.
아무도 무서워 접근을 못 하고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모두 그 M1 소총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위 형이 우리는 여기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천천히 병사를 향해 접근하였다. 그리고 그 M1 소총을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팔이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우리는 미군이 버리고 간 야전삽을 주워 어깨에 메고 다녔다. 아이들은 그 자리에 야전삽으로 땅를 파 그 병사를 묻어주었다.
형이 그의 목에 걸려 있던 군번표를 벗겨 호주머니에 넣고 철모를 벗겨 한 친구에게 주었다. 형은 언젠가 다시 우리 세상이 되면 이를 당국에 알릴 것이니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엄명(?)을 내렸다.
우리끼리는 형이 대장이었고 대장의 말은 곧 법이었다.
형이 총을 들고 공중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도 격발이 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서 총을 물에 씻었다. 그리고 총구 쪽을 동생이 쥐고 형은 개머리판 쪽을 들고 논둑길을 따라 맨 앞장서서 걷고 우리는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막을 찢는 총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모두 혼비백산하여 무논에 첨벙 엎드렸다. 그런데 내 옆에 쓰러져 있던 동생의 왼쪽 바깥쪽 다리 윗부분 옷이 모두 타버려 맨살이었다. 그 맨살이 불에 타고 그을린 상처가 나 있었다.
개머리판 쪽을 들고 가던 형이 냇가에서 씻은 것을 깜빡하고 무심결에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앞장서서 걸었다면 몇 명은 그 오발탄에 희생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찔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지만, 동생만 총 화상을 그리 깊지 않게 입은 것이다.
이 일을 더 위 형에게만 알리고 부모님께는 감추고 있었는데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자꾸만 진물이 흐르고 엄청나게 고생하였다. 결국 부모님께 사고 경위를 말씀드리고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그 흉터가 험하게 남아있다. 이제 그 동생도 나이가 여든하나다.
나중에 국군이 우리 세상으로 회복시킨 후 아버지는 경찰에 군번을 제출하고 흑인 병사 묻어둔 장소를 알려 처리하였고 경찰서장의 공로 표창을 받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