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도날드 월쉬는 신과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냈지만 나는 이제 막 5살된 손주와 나누는 이야기를 훗날 책으로 묶으려고 노트에 기록한다. 누구나 일상에서 나누는 평범한 대화들이지만 특히 어린아이와 나눈 이야기에서 쉽게 흘려 버리지 못하는 주제들이 있다.
올 봄에 워싱턴DC를 방문했을 적이다. 도시 중심가에 사는 아이의 관심거리는 그 나이의 어린아이가 가지는 흥미와 조금 달랐다. 우리 부부가 도착한 날 공항으로 마중 나온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진지하게 당부했다. “할머니, 이곳은 할머니가 사시는 곳과는 달리 건물도 많고 교통도 많이 복잡하니 어딜 다니든 특히 조심하세요.” 맹랑한 아이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이솝 우화의 하나인 ‘시골 쥐와 도시 쥐’ 가 생각나서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아이가 Pre-K를 마친 다음날 여름방학을 외가에서 보내려고 앨라배마로 내려왔다. 사실 작년 여름부터 우리는 겁도 없이 아이를 보내라고 딸과 사위에게 당부했는데 아직 어리다면서 응하지 않았다. 어릴 적 대구에 살면서 여름방학이 되면 고산이나 경산에 있는 친척집으로 가서 사촌들과 사과밭이나 참외밭 포도밭을 설치고 다니며 천방지축 놀았던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나는 아이에게 남부에서의 여름방학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근무시간이 길어서 매일 아이와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사는 딸에게 우리 부부의 나이를 언급하며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여름방학에는 꼭 우리와 함께 보내도록 해달라고 감정적인 협박을 한 것이 효과를 냈다. 지난 5월에 5살이 된 아이는 코비드 백신주사를 맞았고 6월에는 2차까지 맞았다. 엄마 손을 잡고 이곳에 온 아이는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참 잘 왔다” 해서 “어째서?” 하고 물었더니 “하늘이 넓고 교통이 복잡하지 않아서요” 모두 웃었다.
아이를 데리고 애틀란타에 가서 작은딸네 가족을 보고 마침 영국에서 방문온 사위의 형제들과 만났다. 그리고 미시시피에 가서 그곳에 사는 한인 친척들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한 아이는 동양과 서양의 가족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자기가 아는 한국어는 “할머니와 안녕하세요” 뿐이라던 아이는 태권도장에 들러 강습을 사인하고 태권도복을 들고 나오며 “태권도” 를 보탰다.
지난 몇 달 부모와 여름방학에 관한 세부적인 대화를 나누며 마음준비를 했던 아이는 자기 엄마가 일주일 함께 지낸 후 워싱턴DC로 돌아가도 울지 않았다. 딸과 아이가 서로 키스를 날리며 헤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번도 부모와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는 아이가 어떻게 적응할 지 걱정했다. 하지만 매일 잘 먹고 씩씩하게 잘 노는 아이는 집안 곳곳에서 재미난 물건을 찾아내 응용해서 자신의 놀잇감을 만든다. 그리고 대도시 중심가 콘도에 사는 아이에게 앞 뒤 뜰은 신나는 학습체험장이고 공을 차는 놀이터다.
수영과 태권도를 배우고 YMCA 여름 캠프를 다니며 할아버지를 도와서 뜰 일을 하고 나와 빵을 만드는 아이는 남부의 더위를 좋아한다. 이곳 도서관이 자기가 다니는 도서관에 비해서 너무나 작은 것에 놀라고 어떤 행동에나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다. 이곳에서 지낼 54일분 비타민을 샌드위치백에 넣어온 아이는 저녁을 먹은 후에 꼭 하나씩 챙겨 먹으면서 그 숫자가 줄어드는 날을 기다린다. 마치 예전에 내가 혼자 일년 해외근무를 하면서 매일 달력의 숫자를 체크하며 가족에게 돌아갈 날을 기다렸던 것 같아서 좀 안스럽다.
뭐든 질문이 많고 답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줄기차게 다른 질문으로 연결시키는 아이와 간혹 놀랍도록 이론적인 대화를 나눈다. 겨우 5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날카롭다. 인내심이 적은 남편은 얼렁뚱땅 대답했다가 아이에게 핀잔을 받았고 나는 구글 열심히 뒤진다. 특히 정체성에 관한 아이의 불평은 내 의식을 깨운다. “남자애여서 꼭 짧은 머리 스타일을 해야 하느냐? 왜 사람들은 각 개인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느냐?” 어깨 길이의 머리를 가진 손주를 만난 지인들이 모두 여자아이로 착각한 것을 아이는 싫어한다. 나도 기존의 관점을 가지고 아이에게 머리를 짜르자고 종용하니 답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