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사는 정신과 의사 기테 보미스터는 2020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완치 후에도 극심한 피로·호흡 곤란·가슴 통증·브레인포그(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하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현상) 등의 후유증이 1년 넘게 지속되자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
보미스터는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처럼 ‘코로나19 장기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한 치료법으로 소개된 ‘혈액 세척(Blood washing)’에 대해 알게 됐다. 혈액을 체외 여과기로 걸러, 노폐물을 제거한 뒤 체내로 돌려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코로나 후유증을 떨치기 위해, 지중해 동부 사이프러스까지 건너가 혈액 세척 6회, 고압 산소 치료 9회, 비타민 정맥 주사 투여 등의 시술을 받았다. 치료 기간 숙식비를 포함해 총 6만8000달러를 썼다. 하지만 치료 받은 지 두달이 지나도록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12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코로나19를 앓은 뒤 장기 후유증에 시달리는 환자 수천 명이 혈액 세척과 같은 검증되지 않는 고가의 시술을 받기 위해 독일·스위스·사이프러스 등으로 원정을 떠나고 있다는 내용의 영국의학저널(BMJ) 연구 보고서를 인용 보도했다.
현재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코로나19 장기 후유증이 모세혈관 속 산소 순환을 막는 혈액 응고로 유발된다는 가설에 따라, 환자에게 혈액 세척 치료법과 항응고제 등을 의사가 임의로 처방하고 있다. 대다수 유럽 국가는 의료진이 환자 동의하에 실험 단계인 치료법을 시술하는 것을 허용한다.
실제로 독일의 내과 의사인 비테 예거 박사는 지난해 2월부터 자신의 병원에 혈액 세척 치료법을 도입했다. 코로나19가 혈액 응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보고서를 읽은 뒤, 혈액 세척 치료법이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해서다.
예거 박사는 BMJ와의 인터뷰에서 “치료법이 아직 실험 단계란 걸 알지만, 임상시험 기간은 너무 길고 누군가는 고통받고 있다”며 “이미 내 병원에서 수천명의 환자가 이 방법으로 치료를 받았고, 효과도 컸다”고 말했다.
환자들의 반응은 다르다. 영국인 크리스 위덤(45)은 코로나19 장기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지난해 독일에서 혈액 세척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치료비·숙박비 등을 포함해 약 7000파운드(약 8300달러)를 썼다.
BMJ는 “일부 의료진과 연구원들은 혈액 세척 치료법이 코로나19 장기 후유증을 해결할 유망한 방법으로 믿고 있지만, 환자들은 증상을 개선하는 데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서 “입증되지 않은 치료법에 막대한 돈을 지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국 버밍엄대 코로나19 후유증 치료 연구원인 샤밀 하룬 역시 “이런 ‘실험적인’ 치료는 임상시험 단계에서만 취급돼야 한다”며 “절박한 환자들에게 검증되지 않은 치료를 받게 하면서 파산하게 만들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한편, 코로나19 장기 후유증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마땅한 약이나 치료법도 없는 상태다. 하지만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영국 통계청은 코로나19 장기 후유증 환자가 지난 1월 130만 명에서 5월 200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추산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감염자의 10~20%가 감염 이후 최소 2달 이상 후유증을 겪는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