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4.
뜨거운 열기가 아물아물 아지랑이를 만드는 도로를 달려 도서관에 들어섰다. 갑자기 확 달려드는 냉기에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는 것 같다. 더위가 따라 들어올까 얼른 문을 닫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들 몇몇이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방학을 맞아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방학을 맞은 것처럼 신난다. 내가 자주 방문하는 ‘파이크 로드(Pike-Road) 도서관’은 어른과 어린이가 한 공간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다. 작은 공간을 오밀조밀 나눠 유아들을 위한 블록놀이, 컴퓨터학습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책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컴퓨터를 만지던 두 아이가 토닥토닥하다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눈이 꼭 닮은 것이 형제인가 보다. 작은 아이가 뭔가 많이 억울했는지 책을 보고 있는 엄마에게 달려가 옷자락을 잡아끌자 엄마는 말없이 큰아이를 눈빛으로 혼낸다. 아마도 너는 형이니까 동생에게 양보하라는 눈빛 명령이겠지.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형제간의 다툼과 그것을 중재해야 하는 부모의 피곤함은 어디를 가나 똑같은가 보다.
이때, 희한하게 손에 잡힌 그림책이 〈The twins’ blanket〉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 〈쌍둥이는 너무 좋아〉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이 책을 쓰고 그린 염혜원 작가는 실제로 쌍둥이라고 한다. 그림책은 쌍둥이인 두 아이가 책의 양쪽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모든 것을 함께 해야만 했던 두 아이는 이제 침대와 이불을 분리해야할 만큼 자랐다. 그동안 함께 덮었던 색동이불을 서로 양보할 수 없어 다투기 시작하고, 엄마는 결국 새 이불을 따로 만들어 준다. 각자가 좋아하는 노란색과 분홍색의 이불에 색동이불 조각을 붙여서 만든 새 이불을 덮고 각자의 침대에서 자야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고, 쌍둥이는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 꼭 맞잡고서야 편안하게 잠든다. 쌍둥이가 그동안 편안히 잘 수 있었던 것은 색동이불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림책은 설명하지 않는다. 책장을 한 장씩 넘겨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쌍둥이의 다르면서 꼭 닮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게 된다. 이런 게 그림책의 참맛이다.
흔히 가족을 애정이 아닌, ‘애증’의 관계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 말이 남들 앞에서 자랑하기도 흉보기도 계면쩍어서 적당히 둘러대는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정말 가족은 애증의 관계, 즉 사랑과 미움이 알알이 박힌 관계라는 것이 실감난다. 가족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미움도 함께 담기는 것 같다. 미움 없이 오직 사랑만 하다면 아직 깊은 관계가 아니라 치기어린 풋사랑 같아 보이기도 한다. 진정한 사랑에는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서 미움과 괴로움까지 녹여내는 이해와 용서가 담겨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가족뿐 아니라,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미움은 공정한 나눔이 되지 않아 생기는 것 같다. 인간에게 공정한 나눔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다. 각자의 노력에 대한 공정한 인정과 보상이 없으면 인간은 분노하고 삐뚤어지기 마련이다. 너는 ‘무엇이니까’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힘없고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시켜 주기도 한다. 양보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양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구조 속에 나를 가두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아벨의 죽음을 왜 신은 막지 않았을까? 신의 뜻을 알기 어렵듯이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공정한 재판관이, 또는 공정한 나눔을 해주기는 어렵기만 하다. 또한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많은 불공평한 나눔도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쌍둥이로 태어나는 것이 쌍둥이의 선택이 아니듯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이해하려고, 사랑하려고 끝없이 노력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움과 갈등을 넘어서 애증의 관계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