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뒤 유럽 가톨릭행사에서 첫 공개행보
“종교 신념에 적개심 증가” 보수가치 수호 필요성 역설
미국의 낙태권 폐지 판결을 주도한 연방 대법관이 국제사회의 비판에 되레 ‘역사적 영광’이라며 냉소하는 태도를 보였다.
28일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새뮤얼 알리토 대법관은 지난 21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종교자유를 주제로 열린 행사에서 연설자로 나서 낙태권 폐지 판결 이후 비판 여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대법원의 판결 이후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외국 정상들이 일제히 비판적인 논평을 낸 바 있다.
알리토 대법관은 이에 대해 “미국의 법률을 두고 논평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일련의 외국 정상들에게서 꾸짖음을 당한 미국 대법원 역사상 유일한 결정문을 쓰는 영광을 안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정상 중에는 보리스 존슨 전직 (영국) 총리도 있었지만 그는 그 대가를 치렀다”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끌어냈다.
존슨 총리는 낙태권을 축소한 미국 대법원의 결정을 ‘거대한 역행’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파티 게이트’에 시달리다가 이달 7일 사퇴를 발표하고 차기 총리가 선출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총리직을 유지하고 있다.
알리토 대법관은 또 영국 해리 왕자가 이달 18일 유엔에서 대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듯한 발언을 한 데 대해선 “대법원 결정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비교하는 듯했는데, 매우 상처가 됐다”고 언급하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해리 왕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하면서 “미국에선 헌법적인 권리가 후퇴했다”고 발언했다.
이날 회의는 미국 가톨릭대학인 노터데임 로스쿨의 후원으로 열렸다.
알리토 대법관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가톨릭은 낙태를 태아의 생명을 박탈하는 죄악으로 간주하고 낙태권에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다.
낙태권 폐지에 찬성한 대법관들의 얼굴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로이터
연방 대법원은 임신 28주 전까지 여성이 임신 중단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난달 24일 폐기했다.
대법관 9명 중 5명의 찬성으로 내려진 이 결정으로 낙태권은 헌법적 권리에서 배제되고 그에 대한 처분은 각주에 위임됐다.
알리토 대법관은 다수 의견서에서 “헌법에는 낙태에 대한 언급이 없다”며 “헌법에 언급되지 않은 권리를 보호하려면 그런 권리는 이 나라의 역사, 전통에 깊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하며 질서 있는 자유의 개념에 내재돼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로마 연설은 알리토 대법관이 낙태권 폐지 판결을 내린 뒤 처음으로 나선 공개석상이었다.
짙은 보수성향을 지닌 알리토 대법관은 미국과 유럽에서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취지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그는 “닥쳐오는 문제는 단순히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지뿐이 아니다”며 “전통적, 종교적 신념을 겨냥한 적개심이 자라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알리토 대법관이 대법관 중에서 종교적 권리를 가장 강조하는 인사이며, 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고 때때로 주장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