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영롱한 별을 볼 수 있다. 햇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곡식은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사람도 고난 속에서 강해지고, 고난 속에서 지혜로워지고,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불행을 겪게 되면 주저앉거나 무너지지만,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그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선다. 인생을 자신있게 사는 사람음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라며 한계를 규정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 생각한다.
다산 정약용은 평생 올곧은 신념을 가지고 중심을 지키며 후회없는 삶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삶의 모든 여정에서 절망에 맞닫뜨린 다산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다산에게 절망은 매가 날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삶을 포기할 이유는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던 혼란한 해(1762년)에 태어났고, 벼슬에 올라 나랏일을 하며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았다. 그러다 결국 서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유배인이 되었고,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쓴 〈황사영 백서〉에 연루되어 오랜 생활을 강진에서 묶여 지냈다.
공적인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험난한 다산의 삶은 사적인 기록을 보태면 더욱 처절해진다. 다산은 부인 홍씨와 6남매를 낳았지만, 4남2녀를 가슴에 묻었고, 함께 수학하던 동료들과 형 정약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이 ‘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이다. 다산은 어떤 상황에서든 세상에 휩쓸리지 않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산에게 신념을 지키는 방법은 신념을 가지고 현실을 살며, 생각을 크게 가지고, 생각에 그치지 말고 행동하며, 주변을 신경쓰는 일이었다.
다산은 가문으로 보나 개인으로 보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정약용의 집안은 이른바 ‘8대 옥당’이라 불린 명문가였다. 정약용은 스물두 살에 소과시험인 생원시에 합격, 스물여덟에는 대과인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병조참의(국방부 국장), 황해도 곡산부사, 부승지(대통령 비서)등을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런데 서른아홉살 때부터 정약용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주군이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 그 시초였다. 정조의 새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는 손자가 죽은 뒤 심환지를 비롯한 보수파와 손잡고 정조시대의 개혁을 파괴했다. 이 때문에 정조의 측근들은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정약용도 그런 표적이었다.
정조의 시신이 땅에 묻히고 얼마 뒤 정약용은 자택에서 의금부 관리들에게 체포되었다. 죄목은 ‘서학쟁이’였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였다. 오래 전에 천주교를 떠난 사람에게 이런 죄목을 뒤집어씌운 것은 정약용 체포의 본질이 정치탄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정약용의 수난은 무려 18년간이나 계속됐다. 구속된 이후에 그는 경상도 장기현(포항시)과 전라도 강진군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렇게 새장에 갇힌 새가 되어 그는 18년을 견뎌야 했다. 18년의 수난생활에 대해 정약용은 독특한 대처법을 취했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승리를 위한 날개짓이었다.
특이한 것은 정약용의 날개짓이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중앙정계에 복귀하거나 반정부운동을 벌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있는 현재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완성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승리를 향한 정약용의 날개짓 중의 하나는 유배지 주민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장기현 유배 당시, 정약용은 죽림서원이란 곳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현지 선비들의 저지로 문앞에서 쫓겨난 것이다. 두번째 유배지인 강진군에서는 한동안 숙소를 구하지 못해 마음을 졸여야 했다. 정약용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집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주막집 여주인의 도움으로 숙소 문제를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다. 여주인이 그에게 객실 하나를 선뜻 내어준 것이다.
이렇게 냉대를 받으면서도 정약용은 유배지 주민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베풀었다. 대표적 증거중 하나가 〈촌병흑치〉라는 저서다. 이 책은 장기현 주민들을 위해 저술한 의료지침서다. 병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뱀을 잡아먹을 정도로 의료사각지대였던 장기현 주민들을 위해 이 책을 지었던 것이다.
승리를 향한 정약용의 날개짓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전투적 글쓰기였다. 그가 남긴 저서는 약 500권이다. 저술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기간은 18년간의 유배생활중이었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검찰청)의 보고서나 재판서류를 근거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법적으로는 이미 죄인이 되었지만, 역사의 재평가를 받기 위해서 열심히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생각이었다.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쓴다면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올바로 평가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정약용은 자기에 대한 현실권력의 법적 평가를 무력화시키고 미래권력의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그토록 치열하게 글을 썼던 것이다. 죽어서 승리하고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글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다. 오랜 유배 생활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성실을 제일로 친 사람이었다. 500권의 책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역전의 발판으로 만들었다. 쓰러지면 쓰러진 채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자 그는 불굴의 날개짓을 했다. 결국 그는 새장을 뚫고 날아올랐다. 정약용은 그렇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