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둘 만한 미국 대통령
6. 7대 앤드루 잭슨 (생몰 1767~1845 / 대통령 재임 1829~1837)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 출신. 14살에 전쟁고아가 됐지만 자수성가해 변호사가 되고 테네시에서 정치가로 명성을 얻었다. 1812년 미영전쟁과 인디언 토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전쟁영웅’으로 불리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18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고 1828년 다시 출마,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최초의 비주류 출신, 최초의 서부 출신 대통령이며 미국 대중 민주주의의 개척자로 불린다.
당선 후 ‘서민 대통령’을 자임하며 관료제 개혁, 참정권 확대, 기회 균등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하지만 1830년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 등을 통해 남동부의 수만 명 원주민을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추방하는 등 인종차별적 행보로 지금은 재평가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때문에 20달러 지폐에 있는 그의 얼굴을 노예 출신의 흑인 여성 해리엇터브맨으로 대체하는 법안이 마련됐다가 트럼프 당선으로 폐기되기도 했다.
7. 18대 율리시스 S. 그랜트 (생몰 1822~1885 / 대통령 재임 1869~1877)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으로 로버트 리 남군 사령관의 항복을 받아낸 전쟁영웅이었다. 링컨의 후광으로 1868년 46세의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 됐지만 대통령으로서는 무능했고 후대의 평가 또한 최악이었다.
끊임없는 인사 실패와 주변 인물의 뇌물 수수, 그치지 않는 부정부패 스캔들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50달러 지폐에는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잘못보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인으로서의 공이 더 크게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8. 28대 우드로 윌슨 (생몰 1856~1924 / 재임 1913~1921)
1차 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고 국제연맹을 창설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를 세계에 전파한 인물로 평가된다. 버지니아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났으며 프린스턴대 교수 및 총장을 역임했다.
민주당 영입 케이스로 뉴저지 주지사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 대통령까지 됐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모두 그가 내세운 ‘민족자결주의’ 영향을 받았다.
프린스턴대 총장 재직 시절 흑인 학생의 입학을 금지하고 대통령 재임 땐 흑백분리 방침을 지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2020년 프린스턴 국제관계대학원 명칭에 붙여졌던 윌슨의 이름이 삭제되기도 했다.
9. 33대 해리 S. 트루먼 (생몰 1884~1972 / 재임 1945~1953)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4선 취임 80여일 만에 갑자기 서거하자 부통령으로 33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제2차 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의 항복을 받아 냈으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투하 명령을 내린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6.25전쟁이 터지자 미군 파병을 결정했으며 전쟁 중 만주 폭격을 주장한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를 전격 해임, 확전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국에선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라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20세기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한 ‘고졸 대통령’이었다.
10. 35대 존 F. 케네디(생몰 1917~1963) / 재임 1961~1963)
미국 역사상 최연소로 백악관에 입성했다. 미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 대통령이기도 했다. 아일랜드계 후손으로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으며 보스턴이 정치적 고향이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기 전에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인종차별 철폐와 저소득층, 여성, 노인의 지위 향상에 힘썼으며 3차 대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었던 쿠바 위기를 해결하고, 아폴로 계획을 출범시켜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절대 우위를 갖게 하는 등 짧은 재임 기간에도 미국인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텍사스 댈러스에서 암살됐지만, 사후 60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추모 열기가 뜨겁다.
미국 대통령 어떻게 뽑나
미국 대통령이 되려면 미국서 태어난 만 35세 이상으로 최소 14년 이상을 미국에서 살아야 한다. 대통령 선거는 통상 선거가 있는 해의 11월 첫 번째 일요일 다음 화요일에 실시되며, 새로 선출된 대통령 임기는 선거 다음 해 1월 20일부터 시작한다. 임기는 4년이며 1회 중임이 가능하다.
미국 대통령 선출 절차는 간접선거 방식이다. 각 주 유권자들이 소속 주 출신 연방 상·하원 의원 수만큼 선거인단을 선출하며 이들이 대통령을 최종 선출한다. 선거인단 총수는 538명으로 상원의원 수(100명)에 하원의원 수(435명) 및 워싱턴DC(3명) 등을 합친 수다.
선거인단은 승자독식 방식이다. 특정 주에서 한 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그 주에 배당된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한다. 때문에 일반 유권자 선거에서 이기고도 선거인단 확보에서 뒤져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온다. 선거인단이 많은 주는 캘리포니아(55명), 텍사스(34), 뉴욕(31), 플로리다(27), 일리노이(21), 펜실베이니아(21) 등이다. 선거인단의 과반수(270명)를 확보하면 사실상 당선이 결정된다.
한국 방문한 역대 미국 대통령
한국을 처음 방문한 미국 대통령은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다. 그는 1952년, 6.25 전쟁 중에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1960년에 미국 대통령 신분으로 다시 한국을 찾아 이승만 대통령의 환대를 받았다.
1966년엔 36대 린든 존슨 대통령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1974년엔 38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한국 방문했다.
조지아주 출신인 제39대 지미 카터 대통령도 1979년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카터 대통령 방한은 한국의 인권 문제,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 예민한 현안으로 인해 환영 우호 일색이었던 과거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의 분위기와는 아주 달랐다.
1983년에는 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방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41대 (아버지)조지 부시 대통령은 1989년과 1992년 두 차례 노태우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이후 한국의 비약적 경제 발전과 더불어 미국의 전략적 동반자로서의 위상도 높아지면서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수시로 이어졌다.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집권 8년 동안 3번 한국을 방문했다. 1993년, 1996년엔 김영삼 대통령과 1996년엔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했다.
43대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3번에 걸쳐 한국을 찾았다. 44대 버락 오바마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많은 4번의 한국 방문을 기록했다. 45대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한 지도자를 동시에 만난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2017년과 2019년 한국을 방문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했으며 2018년과 2019년 2차례에 걸쳐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한 김정은과도 회담했다.
46대 조 바이든 현 대통령도 2022년 5월 한국을 공식 방문, 막 임기를 시작한 윤석열 신임 대통령을 만났다.
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 대통령의 임기는 몇 년인가? (We elect a President for how many years?)
답. 4년 (Four)
문. 대통령 선거는 몇 월에 하나? (In what month do we vote for President?)
답. 11월(November)
문. 현재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 (What is the name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Now?)
답. 조 바이든(Joe Biden)이다. 간혹 소속 정당을 묻기도 한다. 답은 민주당(Democratic)이다. 직전 45대는 도널드 트럼프였고 소속은 공화당(Republican)이었다.
문. 대통령 유고 시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If the President can no longer serve, who becomes President?)
답. 부통령(the Vice President)이다. 그다음 승계자는 연방 하원의장(the Speaker of the Hous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