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어머니가 붙여준 내 별명이 느림보 거북이였다. 걷는 것도 느리고, 일 하는 것도 느리며 뭘 받아들이는 것도 느려서 답답함에 붙여준 별명 아닐까 싶다. 나의 학창시절은 숙제를 해도 준비 과정이 너무 길었고, 시험공부도 요점 정리를 꼼꼼히 하느라 시간에 늘 쫓기었던 것 같다.
친구를 만들어 가는 과정도 내게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시간이 흘러서도 집안 살림부터 사람과의 관계나 일처리도, 뭘 해도 머릿속은 분주하고 바쁜데 움직임은 여전히 조용하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하나씩 정리 해가면서 일을 하는 나와는 달리 부엌이 좀 어지럽게 널려 있어도 후다닥 일을 끝내는 사람이 부러웠고, 작품 구상 하느라 긴 시간 고민에 빠져 있는 나보다는 자유스럽게 표현하는 작가들이 대단해 보였다. 의사표현에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나보다 자신의 감정을 거름 없이 욕먹어도 표현하는 사람을 가끔은 닮고 싶었다.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하는 나와는 다른 것들을 부러워하다 보니, 그런 내가 싫어서 바꿔보려고 무던히도 긴 시간 노력도 했었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느림이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에 천성이 그런 나를 인정하기로 맘먹으면서 편안해진 것 같다. 내 맘에 들지 않는 내 모습들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린 제각각 다른 사람이란 걸… 그 다름은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그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며 살아가는 게 맞다는 걸 느끼게 된다. 느리지만 꼼꼼하게 마무리 잘하는 편이고, 차근차근 끈기 있게 나가다 보면 쉽게 포기하지 않으니 나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는 것 아닐까.
유화를 좋아하며 고집하는 이유 또한 그런 나와 무관하지는 않을 거다. 기름에 갠 물감을 이용해 그리는 그림이다 보니 빠르게 말라버리는 아크릴이나 수채화와 달리, 유화는 건조가 느리다. 완성이 되기까지 오랜 작업시간이 걸려도 시간차에 따라서 바탕에 깔린 색상과 덧칠한 물감을 자연스럽게 섞을 수 있어서 좋다. 내 이야기들을 붓질 하나하나에 얹어서 칠하다 보면 삶처럼 그림도 나에게 희로애락을 준다. 그렇다 보니 느림은 오히려 편안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람과의 관계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처음부터 나와 잘 통하고 잘 맞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삐걱 거리기도 하고, 이해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람이 어느 날 내 안에 들어오기도 한다. 다름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걸 잊어버리면 관계는 힘들어진다. 남편과 38년째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삶을 살고 있는데, 좋은 이웃이나 벗을 만들려면 그만큼 정성과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급변하는 세상에 발 맞춰서 산다는 것도 쉽지 않은 데 그 속에서 사람들과의 인연의 뿌리를 깊게 내린다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세상임을 알기에 배려하고 노력하는 것 같다. 지나온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이제는 나의 느림으로 인한 적당한 게으름과 타협도 하며 살고 있다. 숨 고르기 한 번 더 하며 살다 보면 감사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 빠르게 변화하는 문명의 속도에 맞춰서 우리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의 세대는 느린 세상에서도, 빠른 세상에서도 살며 이제는 느림의 미학도 느끼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과 그 다음 세대들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느림은 여유요, 안식이요, 성찰이요, 평화이며 빠름은 불안이자 위기이며, 오만이자 이기이며, 무한경쟁이다.
땅속에 있는 금을 캐내 닦지 않으면 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마음속에 있는 서정의 창을 열고 닦지 않으면 창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호승 님의 글을 음미해 보며 느림이 갖는 미학적 의미와 가치에 좀 더 마음을 열고 주위를 둘러본다면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