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굴지의 청소용역 회사 일군 사업가
60세부터 일 놓고 배운 것, 번 돈 쓰며 봉사
팔순 생일 때도 차세대 기금 100만불 쾌척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 가 좌우명
“지붕에 비가 새면 세입자는 고쳐달라 전화하지만 집주인은 스스로 올라가 고칩니다, 이제 우리 한인들도 더 이상 세입자가 아닌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8월 27일 테네시주 내슈빌한인회 주최 다민족 평화 축제 ‘라이즈업 투게더’에서 행한 한미우호협회 박선근 회장 연설 중 한 대목이다. 유창한 영어 연설이었다. 연설에서 강조한 그의 신념은 구호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업가로 성공한 이후 끊임없이 돈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구체적으로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내슈빌은 애틀랜타서 4시간여 거리다. 행사장 오가는 길에 박 회장과 동행했다. 오고 가며 긴 시간 사업과 가족, 한인사회, 한국과 미국에 대해 묻고, 들었다. 지난 40여년, 애틀랜타 한인사회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고,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는 박선근 회장의 80년 인생 여정을 돌아본다.
– 최근 청소년을 위한 차세대 기금 100만 달러를 내놓았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올해 80입니다. 뭔가 뜻깊은 일 하나라도 더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세대들이 이룬 발전과 도전 정신을 이어받을 미래 세대를 응원하고 싶었어요.”
박 회장은 2022년 7월 23일 둘루스 1818클럽에서 열린 팔순 잔치에서 이 같은 사실을 깜짝 발표해 한인사회를 놀라게 했다. 박 회장은 전에도 많은 기부를 해왔지만 100만불은 애틀랜타 한인사회에서 단일 기부 금액으로는 사실상 가장 큰 액수였다. 기부금은 차세대 장학재단의 기초 자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 주류 사회에서도 인정하는 큰 사업가로 성공하셨습니다. 어떻게 사업을 일구셨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1974년 미국에 왔습니다. 애틀랜타에는 1978년에 내려왔는데 처음부터 한인사회 봉사를 많이 하게 됐습니다. 영어 때문에 힘들어하는 한인들 고충도 해결하고 일자리도 소개하는 일이었습니다. 1981년에는 13대 한인회장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직접 회사를 만들면 더 많은 한인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겠다는 싶어 시작한 게 1983년에 설립한 제너럴 빌딩 메인터넌스(GBM)라는 청소 용역회사였습니다. 놀랄 정도로 성장이 빨랐습니다. 10년 만에 3000명이 넘는 종사원을 둔 굴지의 회사가 됐으니까요.
지금도 디즈니월드를 포함한 전국 23개 대도시에서 병원, 공항, 주요 관공서 건물이나 대형 빌딩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지난 39년 4개월간 이끌었던 회사는 지난 달 뉴욕의 대형 업체에게 인계했습니다.”
– 단기간에 큰 사업체를 일궈낸 비결이 있었을까요?
“비결이라면 속이지 않았고, 성심껏 고객을 대하려 한 것뿐입니다.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성경 말씀의 실천이지요. 회사가 성장하면서도 초심을 잃지 말자고도 늘 다짐했습니다 ”
– 초심을 지킨다는 것, 누구나 알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일을 대하는 태도에 달렸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화장실 청소한다고 인격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지금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세상이 굴러가는 것이고요.
지금 이 일이 끝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면 또 다른 도약의 기회가 열린다고 직원들에게도 늘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증인이었으니까요. 고객이 100을 기대하면 저희는 110을 서비스하려고도 했습니다. 계약 외의 장소까지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청소했습니다. 당연히 차별화될 수밖에 없었지요. 입소문이 나고 소개에 소개가 이어지면서 회사가 급성장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따로 세일즈맨이 없습니다.”
– 듣고 보니 깊은 인생 철학이고 직업의식인 것 같습니다. 영향받은 사람이라도 있나요?
“6.25가 끝난 직후였죠. 10살이나 됐을까, 동네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다 저를 보고 이름을 물어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 녀석 참 믿음직하게 생겼네.” 그날 이후 이상하게 그 말이 계속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학교 때도 사회에 나와서도 말이죠. ‘그래 나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구나’라는 자부심이 생긴 겁니다.
또 한 사람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이민자였고, 맨주먹으로 시작해 세계적 기업을 일궜으며, 그 많은 재산을 선한 일에 환원했습니다. 미국 전역에 2509개의 도서관을 짓고,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는 데 번 돈을 썼습니다. 사업가라면 본보기로 삼을만한 분이지요.”
-신앙심이 돈독하신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인가요?
“가족 모두 미국 교회에 나갑니다. 오래전엔 한국 교회에 다니기도 했는데 저는 미국 교회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 모두가 하느님 은혜라고 믿습니다. 사업도 봉사도 모두 하느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일인가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남달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책을 좋아하십니까?
“경제나 역사 관련 책을 많이 봅니다. 훌륭한 사람들 전기도 좋아합니다. 책에는 저자의 온갖 노력과 경험, 공부가 다 녹아있습니다. 독서는 앉아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만큼 유익한 것도 없지요.”
박 회장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그룹이 있다. 1980년대 초 애틀랜타 한국학교 설립 초창기 때 힘을 모았던 사람들과 지금껏 함께하는 ‘북클럽’이 그것이다. 송종규, 김태형, 권명오씨와 부부 동반으로 모인다.
박 회장은 지난 해 북클럽에서 함께 읽은 ‘세계인이 놀라는 한국사 7장면’(이종호 지음, 포북출판사 발행)이란 책을 한국에서 구입, 애틀랜타 한국학교와 한인회에 각각 100권씩 기증하기도 했다.
평소 독서광으로 알려진 박선근 회장은 좋은 책을 권하고 나누는데도 열심이다. 2021년에는 애틀랜타한국학교와 한인회에 한국사 책을 기증했다.
– 젊은 시절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미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요?
“제가 카투사로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파주 인근에서 포병으로 근무했죠. 나중엔 행정병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방의 집기 비품은 물론,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쓸고 닦아 반짝반짝하게 해 놓고 근무했습니다. 그때 부대 사령관이 우연히 그걸 보고 감탄을 하더군요. 덕분에 제가 그분 운전병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저를 아들처럼 잘 해주셨는데, 나중에 미국행을 제안하고 비행기 표와 학교까지 주선해주었습니다. 그래서 1974년 인디애나폴리스로 유학을 왔습니다.”
– 아, 유학으로 미국에 오셨군요. 공부는 어땠나요?
“지금 생각하면 아쉽지만, 공부를 이어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웬만큼 영어도 하는 데다 대학에서 특별히 배울 게 뭐가 있겠나 싶었던 거죠. 학교 가는 대신 바로 돈벌이에 나섰습니다. 웨이터도 하고 자동차, 보험 세일즈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대학 졸업장이 없습니다.”
– 우리 사회가 학벌, 간판 많이 따지는데, 대학 졸업장 없다는 이유로 불편을 겪진 않았나요?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죠. 하지만 제가 당당하면 되는 거예요.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 얼마나 실력이 있느냐가 학벌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나중에 제가 사업에 성공하고 나니까 여러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해달라고 부르더군요. 그때마다 대학 측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곤 했어요. 그래서 대학 졸업장은 없지만 박사 학위는 많습니다. 대학생들에게 최고 멘토라는 소리도 듣고요. 하하”
– 사업하랴 봉사하랴 항상 바쁘게 달려오셨는데 어떻게 두 가지가 가능했나요?
“젊었을 때부터 생각해 둔 인생 플랜이 있었습니다. 30-30-30인데요. 처음 30년은 배우고, 그다음 30년은 돈을 벌고, 나머지 30년은 그동안 배운 것, 번 것을 쓰는 봉사의 삶을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60세 생일날부터 회사 일을 놓았습니다.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고 전문 경영인에게 맡긴 거죠. 그때부터 시간이 많아졌고,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는 겁니다.”
박 회장은 60세 이전부터도 한인사회와 주류 사회와의 가교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애틀랜타한인회장을 시작으로 동남부한인회 연합회 초대 회장, 미주한인회 총연합회장을 지냈다. 주류사회 활동도 활발해 2번에 걸쳐 대통령 선거인으로, 미국 유니세프 이사, 조지아주 항만청 부이사장, 조지 부시 대통령의 아시아태평양계 담당 정책 고문 등으로 활약하며 한인의 위상을 높였다. 지금도 한미우호협회장, 좋은이웃되기운동본부, 공화당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한미우호협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1996년에 창립한 비영리 민간단체입니다. 6.25 당시 장진호 전투의 영웅이었던 데이비스 장군을 비롯해 제임스 레이니 당시 주한미국 대사,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 윌리엄 체이스 에모리대 총장, 존 햄비서던컴퍼니 부사장 등과 함께 창립했지요. 이름 그대로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미국 내 한인 이민자 중 미국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을 뽑아 매년 ‘한인 이민자 영웅상’도 수여하고 있습니다.”
박 회장 자신도 한미 우호 협력 증진에 기여한 공으로 미국 유수의 상을 여러 개 받았다. 미국 독립운동에 불을 댕긴 패트릭 헨리의 이름을 딴 ‘패트릭 헨리상’을 한국인으로는 처음 받았고 미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아메리카니즘 훈장’도 수상했다. 또 조지아주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조지아 공공정책재단’으로부터 ‘2020년 자유수호상’을 받았다.
지난 7월27일, 박선근 회장은 한미우호협회를 통해 미 전역 4곳에 한국전쟁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 광고판을 설치해 화제가 됐다. 사진은 애틀랜타 85번 고속도로에 세워진 광고판. 박선근 회장 제공
-좋은이웃되기 운동본부의 활동도 활발하던데요.
“2000년에 설립했는데 이름 그대로 한인들이 미국 발전에 기여하도록 일깨우는 훌륭한 미국 시민 되기 실천 운동입니다. 지난 6월에는 애틀랜타에서 한인 2세, 3세들을 미국 사회의 주역으로 길러내자는 취지로 ‘제6회 백년대계 포럼’을 개최했습니다. 오는 9월 10일에는 각계 명사들을 초빙해 뉴욕에서 제7회 포럼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 2세들에 특히 관심이 많으신데, 미국 청소년 갱생 프로그램도 후원하신다지요?
“예. YCP(Youth Challenge Program)라고 고교 중퇴 청소년들이 미국 주 방위군 부대에 입소해 6개월간 공부하면서 훈련받는 프로그램을 돕고 있습니다. 전국에 29곳에 수용소가 있는데 정기적으로 그룹 멘토링 행사를 실시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도록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퇴소식 때는 어린 나이에 한 번 실패를 경험한 청소년들이지만 “써니가 할 수 있다면 너희도 할 수 있다(If Sunny can, you can)”는 연설도 하고요.(박선근 회장의 영어 이름이 Sunny Park이다).”
박 회장은 퇴소식에 갈 때마다 10불 짜리 새 지폐를 준비해 계약서와 함께 준다고 했다. 계약서에는 10달러를 받음으로써 나는 이제부터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박 회장께선 늘 미국, 미국 하니까 한국과는 거리가 먼 분이라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48년 전 맨몸으로 미국 땅을 밟은 보잘것없는 한국 젊은이에게 기회를 줬고, 지금의 나로 키운 곳이 미국입니다. 이를 감사하고 항상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없을 수 없지요. 그렇지만 대한민국도 누구보다 사랑합니다. 대신 미국에서 정말 한국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 다음 한국을 도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비웃음만 싸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랬다. 서울 왕십리가 고향인 박 회장은 2008년 보스턴에서 주문 제작한 대형 클래식 시계탑을 기증함으로써 왕십리 역 광장 조성의 주역이 됐다. 제막식 땐 한미 양국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왔고, 주한미군 사령관 등 쟁쟁한 미국 측 인사들이 참석해 보기 드문 한미우호의 마당이 됐다.
2020년에는 조지아주 롬(Rome)에 위치한 베리대학에 한국전쟁 영웅 레이몬드 데이비스 장군의 이름의 장학금 22만 달러를 기부했다. 대학 측은 박 회장의 기부금으로 매년 학생 2명을 선발해 한국에 유학을 보낸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배워 ‘친한파 미국인’을 만든다는 것이 취지다. 베리대학은 캠퍼스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남부의 대표적 리버럴아츠 대학이다.
성동구와 조지아주 캅카운티 자매결연도 주선했다. 이후 양국 학생 교류가 이어지고 있고 지방 정부 관계자끼리의 왕래도 활발하다. 모두 한국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 이야기를 맺어야겠습니다. 팔순을 맞고도 늘 젊은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시는데 평소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매일 걷고 근력운동도 하고 가끔 골프와 낚시도 즐깁니다. 12년을 함께 하고 있는 개도 돌보고요. 내년 봄에는 지중해 크루즈 여행도 계획하고 있어요. 회사 일은 놓았지만, 비영리 단체 일로 늘 바쁩니다. 틈틈이 부동산 투자관리 일도 하고 있어요. 바쁘게 일하는 것이 건강 비결이기도 합니다.”
대화 중에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 받는 박 회장의 목소리가 한껏 다감해졌다. 8명 손주 중 한 명이라며 한국에서 방문한 큰 손자 규만이라고 했다. 함께 저녁 먹기로 했다며 자랑했다. 그 순간만큼은 대사업가라기보다 누가 봐도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