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를 정리하다가 1994년에 내가 남편과 어린 딸들에게 보낸 편지를 봤다. 새롭게 읽으니 완전 코미디다. 직장일과 집안일로 지쳤던 시절이었다.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과 딸들에게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열거하고 하지않을 일을 각자에게 분담시킨 것 역시 조목조목 적은 후에 만약에 나를 돕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공갈협박 편지다.
혼자 일년 해외근무를 하고 돌아오니 우리집 질서가 엉망이었다. 내 자리를 확보하려고 인내심을 가지고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일년이 지나도 별로 변화가 없어서 비상수단을 썼었다.
멕스웰 공군기지에서 내 직책은 한 소속의 First Sergeant였다. 사령관의 눈과 귀가 되어서 군인들에 관한 온갖 공적 사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임무라 더러는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도 많이 하고 여러 이슈에 대한 편지도 많이 썼다.
그 버릇을 내 집안식구들에게 적용했다. 줄자를 가지고 사는 내 방식을 남편과 딸들은 힘들어했지만 적당히 적응했다. 군대생활도 사회생활과 마찬가지다. First Sergeant 업무을 하면서 지위 고하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을 다루는 일은 쉽지만 어려웠고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 속담을 실감한 중에 가끔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다.
한 군인이 휴가를 간 사이에 그의 아내가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남편이 갑자기 실종되었다며 찾아 달라는 중년의 영국여자였다. 그녀의 남편이 영국에서 근무하다 만나서 결혼했다는 여자는 미국에 일가친척하나 없고 친구도 없으며 그저 남편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땐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군인의 사무실 동료를 총 동원해서 뭣 아는 것이 없는지 수소문하고 경찰서나 병원에 어디 신원미상의 남자가 있는지 찾았다. 작은 정보들을 모아 분석해서 그를 추적했다.
드디어 변두리의 어느 허름한 모텔에 숨어있던 그를 찾아서 문을 두드리니 핼쑥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사정을 털어놨다.
결혼한 지 몇 년 되었지만 아이가 없어 집안이 조용했는데 어느날 아내가 밖에서 개를 한 마리 데리고 들어오더니 점차 그 숫자가 늘어서 함께 사는 개가 5 마리가 되었다. 아내가 완전히 개들에 몰두하는 바람에 자신은 개집에서 탈출했다.
그의 차 트렁크에는 매일 주섬주섬 들고 나와 모은 옷들이 가득했다.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던 그를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들 부부가 카운슬링 받도록 주선했다. 그 후 유심히 지켜봤다. 여전히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어긋났는데 그가 발령을 받아서 내 책임 밖으로 떠나갔다.
또 한 남자는 아직도 내 가슴에 짠한 기운을 준다. 군대생활 19년 6개월을 한 그가 갑자기 군복을 벗겠다고 나를 찾아왔다. 이제 6개월만 버티면 정년퇴직을 하고 평생 연금을 받으며 의료혜택을 받게되는 상황에서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도무지 정상이 아닌 결정을 내린 그의 상황을 듣고 보니 이해는 갔다.
그는 첫 발령지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가 둘 있다. 이제 고등학생인 아이들을 두고 바람난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하면 자신의 퇴직금 반을 평생 아내에게 줘야하고 아내가 군의 특혜를 받게 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는 그의 마음에는 아이들의 엄마가 아니라 뻔뻔한 여자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 차 있었다.
미운 여자보다 자기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고 또 아이들을 생각해서 시간을 갖고 잘 생각해 보자고 달래서 보내고 몇 달 동안 그의 마음을 다독였지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퇴직할 수 있는 2달을 남겨놓고 그는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군인이 받는 모든 혜택에서 제외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군법은 냉정했다. 그의 전문이 IT 계통이라 그는 이혼하고 타지로 직장을 잡아 떠났고 그의 아이들은 군부대 사택에서 떠나야 했다. 그때 나는 그의 아내를 만났었다. 아이들이 18세 될 때까지 양육비는 받겠지만 그의 퇴직금을 노렸던 그녀는 설마 그가 단호하게 군복을 벗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은 수수께끼다. 요즘 집 가까이 들판에서 유유자적하는 소처럼, 나는 소도시 환경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가끔 생각나는 사람을 회상하고 나와 옷깃을 스친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더라도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