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어투 흉내 내기는 상류사회 유행
왕실 얘기도 예능 즐기듯 시시콜콜 소비
지난 8일 96세로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이야기가 여전히 미국 미디어를 달구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선왕에 이어 25세에 즉위해 70년 동안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다.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간은 정확히 70년 214일이었다. 이는 여왕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 재위 기간인 63년 216일을 훌쩍 넘어 영국 역사상 가장 길고, 유럽에선 루이 14세 프랑스 국왕의 72년 110일에 이은 두 번째 재위 기간이다.
그 동안 여왕을 거쳐 간 영국 총리는 15명이나 된다. 큰아들 찰스 왕세자는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무려 64년을 기다린 끝에 74세에 드디어 왕관을 쓰게 됐다.
앞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공식 장례일정과 찰스 국왕의 대관식이 예정돼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에 대해서도 열광적인 보도를 계속 이어갈 전망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렇게 영국 왕실과 관련된 사건이나 이벤트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보도하는 것일까. 또 미국인들이 왜 그토록 영국풍에 열광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그 배경과 원인을 생각해 본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를 애도하는 나스닥의 빌보드가 올려졌다. 로이터 사진.
# 독립 초기부터 롤모델
미국이 영국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국가라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 관계처럼 적대적일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식민지로 독립전쟁을 하기는 했지만 한일 관계처럼 서로 피맺힌 원한이 생길 정도의 사건이나 착취 같은 일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아메리카 원주민이 살던 땅을 영국계 등 백인들이 차지한 것이었고 이들이 세력을 넓혀나가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갈등이 생기면서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미국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신생국을 만든 후에도 미국인들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영국을 부러워하고 따라 할 수 밖에 없었다. 법률, 정부 조직, 음식, 교육, 예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교과서나 지침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와 배경이 250년 세월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양국 관계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영국은 미국에 없는 것을 가진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그 때문에 미국인들에게 “영국은 부러움인 동시에 콤플렉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귀족문화 따라하기 열풍
한국 사람들이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를 즐기듯 미국인들은 영국 왕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고 대화한다. 이제 고인이 된 여왕과 관련된 에피소드 외에 과거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관련된 사건 등 시시콜콜한 왕실 관련 가십 같은 것에 미국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이유다.
약 10년 전쯤에도 당시 영국 왕실에서 왕위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와 그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과 그 이후의 행적이 현대판 신데렐라 동화처럼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미국인들의 영국 귀족문화 동경은 영화나 상류사회 모임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식 액센트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명 영국 배우들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을 정도다. 상류층에서 영국식 파티와 에티켓 문화가 곧 품격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영국식 액센트 사용은 미국인에게는 한국에서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의 어투를 쓰는 것 같은 그런 느낌과 비교될 정도다.
잔디밭으로 둘러싸인 미국인들의 주택이 영국 귀족의 생활 방식에서 왔다는 해석도 있다. 영국에서도 귀족들이 지위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잔디밭을 선호했는데,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처음에는 영국 귀족 같은 기분을 내기 위해 부유층에서 잔디밭을 집의 앞뒤로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인이나 소작농, 또는 노예들이 잔디밭을 관리했을 것이고 이는 결국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오늘날까지 영국 귀족제가 살아남은 배경에는 미국 부자들이 자기 딸들을 가난한 영국 귀족에게 시집을 많이 보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김병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