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 베이징 국가 박물관의 한·중·일 청동기 유물전의 한국 역사 연표에서 중국 측이 멋대로 ‘고구려’와 ‘발해’를 삭제해 물의를 빚었다. 이에 대한 중국 외교부의 반응이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한다. “학술 문제는 학술 영역에서 전문적인 토론과 소통을 할 수 있고 정치적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마이 웨이’를 가겠다는 말이다. 중국은 한국사 전체를 ‘속방(屬邦)’의 역사로 집어삼키려 한다. “고구려족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 민족이며, 고구려는 중국역사의 일부이다.”이것이 고구려를 바라보는 중국인의 시각이다. 이른바 ‘고구려 역사 빼앗기’다.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땅! 만주 벌판은 우리 선조들이 웅거했던 고토(故土)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부여,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여러 한민족 국가를 건설했던 곳이다. 근세에 들어서는 한반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삶을 개척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진원지이자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이래저래 한민족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땅이다.
한반도 5천년 역사 중 가장 강성한 힘과 넓은 영토를 지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대왕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했다.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대왕은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했다.
광개토대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했다. 그러나 이들은 살수에서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다. 연개소문은 대외강경책을 펼쳤다. 당 태종 이세민은 옛 한 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20여년이나 국정을 주도하던 그의 죽음은 고구려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그는 권력을 아들에게 승계시키기 위한 조처를 취해왔다. 장남 남생은 32세 때에 대막리지로 군국을 총괄했고, 동생 남산은 30세에 대막리지가 되었다. 연개소문에게는 남생, 남건, 남산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죽기 전 아들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나라의 웃음꺼리가 될 것이다.”
연개소문의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이들은 형제간에 서로 싸웠고, 싸움은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인 남생이 국정을 맡았다.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기 위해 동생인 남건과 남산에게 일을 맡겼다.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했다.“남생은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먼저 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처음에 두 동생은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말했다. “두 아우는 형이 돌아와서 그들의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어 그들을 살피게 했다. 그는 두 아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왕명으로 남생을 왕성으로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두려워 감히 돌아가지 못했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토벌하니,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을 당나라로 보내 구원을 청했다. 당에서 우교위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남생을 구원하게 했는데, 헌성이 길을 인도했다.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관리 24명과 함께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군은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했다. 고구려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했다. 그러나 남건은 성을 굳게 지키면서 군사를 보내 싸웠지만 선봉에 선 신라군은 고구려 진영을 깨뜨렸다. 남건은 군사의 일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 및 요묘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했다.
5일이 지나 신성이 문을 여니, 용맹한 신라의 기병 500명이 먼저 성에 들어가고, 이적의 군사가 뒤따라가 성에 올라 북치고 소리 지르며 불을 질렀다. 남건은 스스로 찔렀지만 죽지 않아 당군에게 사로잡혔다.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적장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서 고구려는 멸망했다. 기원전 37년에 동명왕이 건국했던 나라 고구려는 28대 705년 만에 패망했다.
만주지역에는 우리의 선조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웅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말갈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만주족 등이 삶의 터전을 이루면서 성장, 소멸해 갔다. 특히 만주족의 청조가 이곳을 차지하면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북쪽의 1000여 리 되는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통행할 수 없는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정했다. 봉금지역에는 청국인, 조선인 모두 이주할 수 없어서 아무도 살지 못하는 곳이 되었기에, 청과 조선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라는 뜻으로 ‘간도(間島)’라 불렀다.
간도는 두만강의 여러 지류의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에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였으나 토착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 수렵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이주해 간 조선인이 간도를 개척하여 농경지로 만들었고 그곳에 논농사도 처음으로 시작했다. 간도에 조선인이 대거 이주한 시기는 철종 대부터 고종 대까지로, 세도정치의 학정과 수탈에 못 견딘 백성들과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들어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중국은 고구려사를 뺏으려고 한다. 고구려사를 뺏기면 3천년 역사를 잃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고구려사를 살려내지 못하면 ‘반만년 유구한 역사’ ‘삼국시대’라는 표현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시 우뚝 서 뜨겁게 움켜쥐어야 할 곳, 고구려 땅이다. 역사를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자만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