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장례식, 추모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곧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해서 의과 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이기를 바란다.”
지난 4일 별세한 김동길 연세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11년 전 생일(10월 2일)에 이런 내용의 편지를 당시 이철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 앞으로 보냈다. 원고지 한장 분량의 이 편지에서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만약 법적 절차가 필요하면 나에게 미리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고(故)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2011년 10월 이철 당시 연세대 의료원장에게 보낸 편지. 그는 ″내가 죽으면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추인영 기자
김 교수의 임종을 지켰던 제자인 김동건 아나운서는 5일 중앙일보와 만나 이 편지를 공개하고 “평소에 늘 시신을 기증한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이렇게 편지까지 써놓으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난 4일 오후 10시 30분쯤 숙환으로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지난 2월 코로나19에 걸렸다가 회복했지만, 3월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김 아나운서는 “코로나19에 걸렸을 때도 매일 통화했는데 증상이 전혀 없고 멀쩡하다고 하셨다”며 “음성이 나왔다고 며칠 후 보자고 했는데 (완치 후) 2~3일 만에 갑자기 응급실로 가셨다”고 말했다.
군부독재 비판하다 두 번 해직
제자들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연세대 동문회장으로 기획했던 장례식도 유족과 상의해 취소하고, 서대문구 자택에 분향소만 마련했다. 고인은 이 자택도 생전 누나인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1921~1990)을 기리기 위해 원로 건축가 김인철에게 의뢰해 ‘김옥길 기념관’으로 건축해 이화여대에 기증했다.
이날 분향소에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등이 방문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변호사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등도 이곳을 찾았다.
고인은 1928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46년 월남해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에반스빌대와 보스턴대에서 각각 사학과 석사,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군부독재 시절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다가 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해직 후 복직했지만,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해직됐다.
80년대 정치평론을 하면서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나비넥타이와 콧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84년 정권의 유화 조치로 교단에 다시 섰지만, 점차 진보 진영과 거리를 뒀던 고인은 91년 강의에서 ‘강경대 치사 사건’ 관련 발언으로 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이며 반발하자 “배반감을 느낀다”며 스스로 강단을 떠났다.
“이게 뭡니까” 유행어로 인기
고인은 현실 정치에도 뛰어들었다. 삼김 정치 청산을 주장하며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설립해 신당 창당을 준비하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해 92년 강남에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94년 신민당을 창당한 뒤 이듬해 김종필 전 총리의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했다가 15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탈당해 정계를 은퇴했다.
안철수 의원(오른쪽)이 지난 1월 2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자택을 찾아 김동길 명예교수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말년에는 보수 논객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가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고인은 훗날 “노무현 대통령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까지도 유튜브 채널 ‘김동길 TV’를 운영하고 종합편성채널 패널로 출연하며 활동을 계속해 왔다. 보수 원로 모임인 한민족원로회 공동의장을 지냈다. 올 초엔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후원회장을 맡아 야권 후보 단일화를 촉구했다.
이날 오후 일찍 분향소를 찾았던 안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어려웠던 대선 과정에서 큰 힘이 돼 주셨고, 단일화 과정에서도 현명한 조언을 해주셨다”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한민국이 잘 되기만을 바라셨던,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지식인”이라고 추모했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