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변론에 나선 원고의 변호인은 첫 문장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내렸습니다. 직접 법정에 나오지 못한 원고 신성혁(신송혁, 아담 크랩서)씨가 재판부 앞에서 흘렸을 눈물을 대신 떠올렸기 때문일까요. 그를 대리한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첫 문장을 읽는 동안 두 번 정도 멈추고 조용히 숨을 골랐습니다.
◇수십 년 만에 한국 땅 다시 밟았지만…
이 재판은 지난 2019년 신씨가 홀트아동복지회(홀트)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신씨는 세 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입양됐다가, 37년 만인 지난 2016년 추방됐습니다. 양부모의 아동학대, 두 차례의 파양을 겪으며 열여섯의 나이로 노숙 생활에 내몰렸던 신씨는 성인이 돼서야 자신에게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씨의 과거 경범죄 전력까지 문제가 돼 미국에서 추방됐는데, 신씨 측은 과거 홀트와 정부가 입양 절차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8부(박준민 부장판사)는 18일 이 사건의 마지막 변론 기일을 열고 양측의 주장을 정리했습니다.
원래 이날은 신씨가 직접 법정에 나오기로 했었습니다. 미국에서 갑자기 쫓겨난 신씨는 자녀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기 위해 멕시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요. 그는 최근 생모가 있는 한국에서 정착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결국 법정 진술도 포기하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김 변호사는 최종변론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며 “다시 한국을 떠난 원고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으나 타의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뽑힌 원고의 삶을 통해 조심스럽게 이유를 짐작해본다”고 했습니다. 또 “선의로 포장된 일의 피해자는 누구의 선의도 믿지 못하게 된다”면서 “신씨는 비명을 지르는 심정으로 소를 제기했으나 누구의 선의도 믿을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법원조차 믿지 못해 진술을 포기하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왜 그는 다섯개의 이름으로 불렸나
신씨는 다섯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아담 크랩서를 비롯해 현지 가정을 전전하며 생긴 이름, 그리고 ‘신성혁’과 ‘신송혁’까지. 신씨 측은 이름이 여러 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홀트가 신씨에게 생모가 있었는데도 부모 정보를 기재하지 않고 기아 호적(고아 호적)을 만들어 입양을 보냈고, 이 과정에서 본래 이름 ‘신성혁’이 아닌 ‘신송혁’으로 기재됐다고 하는데요. 기아 호적이 있으면 입양 절차가 보다 간단해졌습니다. 양부모가 아동을 직접 보지 않고도 대리인을 통해 입양하는 ‘대리 입양’이 허용됐던 겁니다.
더 나아가 당시 홀트가 아동이 현지에서 시민권을 획득했는지 확인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국적 취득은 아동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니 이를 확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면서요. 정부에게도 제대로 홀트를 관리하고 감독하지 않은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홀트와 정부의 의견은 좀 다릅니다. 홀트 측은 “당시 법에 따라 최선을 다했고, 신씨의 사후관리에도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입니다. “신씨의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홀트의 책임은 아니다”라고도 했습니다. “당시 법과 규정에 따라 모든 절차가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의무 위반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주장도 이어왔습니다.
재판부는 오는 12월 20일 약 4년 만에 이 사건의 1심 결론을 내릴 예정입니다.
◇아담 크랩서만 겪은 일이 아니다
홀트와 정부 측은 당시 규정에 따라 진행된 일이라고 하지만, 결국 이 ‘쉬운 입양’ 시스템 속에서 힘겨운 삶을 시작한 이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 사건 재판부에 전문가 의견서를 낸 이경은 국경너머 인권 대표는 “자신의 입양을 관장했던 법과 제도가 얼마나 허술하고 정의롭지 못했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입양인들은 화가 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표는 최근 기아 호적과 대리 입양, 고액의 입양 수수료 등의 구조를 지적한 영문 저서를 들고 해외 입양인들을 만났는데, 분명 신씨만이 느끼는 분노와 억울함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씨의 대리인단 역시 “입양 당시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해 2만5000명에서 3만명의 입양인이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추정하고 있고요.
이 대표는 지난달 24일 유럽 북투어 보고회를 열고, 입양인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있는지 정부 차원에서 조사에 나선 스웨덴과 네덜란드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아동들을 보낸 국가들 역시 현지 조사에 함께 나서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대표는 “입양인들이 부자 나라의 부잣집으로 입양을 가는 경우는 극소수”라며 “시골 마을에 입양을 가 마을에서 동양인을 찾아볼 수도 없어 어린 시절부터 혼자서 모든 혼란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쉬운 입양’ 절차에서 비롯된 입양인들의 상처를 제대로 챙겨야 할 때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