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꾸물거리는 게 비가 올 모양이다. 아침부터 시커먼 구름이 드리운 걸 보니 장대비가 분명하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드리워 보지만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습기는 집안 구석구석 습한 공기를 뿌려댄다. 왠지 이런 날 아침이면 난 그냥 잠자리에 다시 들어가곤 한다. 오늘도 역시 비를 피하듯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체념한 채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쪼로로 쪼로로” 물소리도 나고 “또닥또닥” 도마질 소리까지 난다. 행여 시끄러울까 살포시 움직이는 몸짓이 소리 마디마디에서 묻어 나온다. “엄마…?” 잠자리에 있는 딸내미가 깰까봐 살금 살금 아침 준비를 하시던 바로 그 소리다. “아! 엄마가 오셨네.” 나른하고 포근한 졸음이 달콤하다. 구수한 아침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면서 축축한 습기를 걷어내고 있다.
어서 일어나야지 하고 이불을 젖히고 몸을 움직이려는데 아무리 움직여도 제자리다. 분명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갔는데 여전히 나는 그대로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뒤척이면 뒤척일수록 소리는 점점 멀어져가고 애가 탄다. “안돼!” 소리 내어 엄마를 불러보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꺼이꺼이 속울음만 난다. 역시 꿈이었다. 갑자기 서러움에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터진다. “왜 더 자지 않고. 엄마가 시끄럽게 해서 깼구나. 어서 더 자라” 하시면서 방문을 살짝 닫아주시던 그 모습이 너무 그리워서 가슴이 아린다.
사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그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 영원히 남아 있다는데, 돌아가신 엄마도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며 여전히 사랑의 눈길을 주고 계실까? 보고싶다. 어느새 하늘은 컴컴해져 있고 장대비가 창문을 두드리며 나를 부른다.
문을 열고 나가 쏟아지는 장대비를 보니 마음이 시원해진다. 타악 타악 세차게 부딪치는 빗줄기에 고개를 들지 못한 풀잎들이 거센 비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마치 그날처럼…
엄마는 비오는 날 빨래하는걸 좋아했다. 그것도 보슬비가 아닌 제법 굵은 빗줄기를 더 좋아했다. 장마철이면 마당 수돗가에는 집에서 제일 큰 우산과 자그마한 빨래들이 쌓여 있었다. 어둑한 하늘 아래 들이치는 빗줄기로 시야는 선명치 않은데 촤아 촤아하는 물소리와 함께 덩달아 움직이는 까만 우산의 들썩임은 집이 아닌 낯선 곳에 있는듯 나에게 묘한 불안감을 자아냈다. 그러면 난 소라가 껍질속에 몸을 숨기듯 방문을 닫고 꼼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다. 왠일인지 엄마의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쫑곳이 귀를 세우고 아무리 기다려도 빗소리만 거칠었다. 불안과 걱정이 밀려들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 이건 장대비였다. 사방은 어둠으로 채워져 일식이 일어난듯 앞을 가늠키 어려운데 거대한 장대비는 물소리를 집어 삼키고 오직 엄마의 우산만 이리저리 흔들리며 힘겨운 무언의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방문 하나 차이로 다른 세계로 넘어온 듯 머리속이 하얘졌다. 갑자기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와락 부둥켜 안았다.
화들짝 놀란 엄마의 얼굴위로 장대비는 폭포처럼 튕겨지고 내 두려움은 바로 엄마의 두려움이 되어버렸다. 재빨리 엄마는 내 손을 잡아 꼬옥 끌어 안아주셨다. 장대비는 여전히 차갑게 온 몸을 때리고 있었지만 난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엄마의 빨래증후군은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그시대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참 고단했던 것 같다. 빗속의 빨래는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유머러스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안으로 들어와 주방으로 갔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아침을 준비하시던 엄마의 향기가 베어나오는지 묘한 설렘이 느껴진다. “정말 여기 계셨었나봐!” 다시 한 번 집안을 둘러본다. 커피 두 잔을 내려 식탁에 한 잔씩 소리내며 내려놓는다. 그리고 나지막이 안부를 물어본다. “엄마, 그곳에서도 편안 하시죠?” 찐한 커피향이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기분 좋은 편안함이 온 몸에 스며들었다. 거기서도 나에게 선물을 주고 가셨네. 그리고 이젠 비 오는 날 아침에도 다시 잠자리를 찾지 않을 것 같다. 장대비는 어느새 그치고 남아있던 물방울들이 유리창에 그림을 그리듯 흘러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