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은 남편의 앞 가슴에 다른 손은 등에 대고 밀면서 “자 어깨를 더 펴요. 이렇게 이렇게 해봐요.” 구부정한 그의 어깨를 펴려고 노력하는 친구 비비가 안타까워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남편 롸저는 더 이상 6 피트 키로 예전처럼 바로 서질 못한다. 상체가 앞으로 많이 기울었고 다리도 휘어서 보폭이 짧았다. 파킨스병을 앓는 그는 5개월전에 만났을 적보다 급속도로 증상이 변해서 내 가슴이 서늘했다.
내 남편과 롸저가 같은 로타리클럽 멤버라 오래전 로타리 행사에서 비비를 만났다. 처음에는 앨라배마 토박이 비비는 나의 정보통이었지만 소탈하고 밝은 성격의 그녀와 가까이 사귀니 시간이 지나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누는 친구로 변했다. 보수 성향이 짙은 남편들과 달리 우리 두 여자는 사회 정치 많은 분야에 진보적인 사상을 가져서 무엇에든 의견이 잘 맞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해서 집을 떠난 후부터 우리는 서로의 생활에 깊숙이 섞여서 자주 어울렸다. 연극, 음악회, 강연회, 계절마다 열렸던 파티, 그리고 나들이를 즐기며 서로를 챙기고 우정을 쌓았다.
더불어 우리처럼 진보 성향을 가진 쉐릴과 디너클럽을 만들었다. 몽고메리와 근교 여러 식당을 섭렵하며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으며 멋진 시간을 보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풍성한 화제거리로 수다판을 벌리던 여자들과 달리 남편들은 짧은 대화 사이사이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굴어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각자 색다른 행사나 멋진 여행지에서 체험한 일들은 근사한 간접체험이 되었다.
그리고 내 딸이 결혼할 적에 비비 부부는 신부와 들러리들을 포함한 신랑신부의 여성 가족들을 모두 그들의 집에 초대해서 점심 파티를 열어서 축하해줬다. 몇 년 후 비비의 사위와 내 사위가 같은 해에 법대를 지원했을 적에 우리는 그들이 같은 대학에 가서 친구가 되길 바랬다. 그러나 그녀의 사위는 앨라배마 법대를 선호했고 내 사위는 조지아 법대로 진학한 바람에 우리의 야무진 꿈은 깨졌다. 하지만 그후 딸들이 손주들을 안겨준 바람에 우리는 동시에 할머니로 승격해서 새로운 행복을 함께 누렸다.
비비는 많은 삶의 도전을 받았지만 늘 긍정적인 자세로 어떤 상황이든 잘 관리해왔다. 노약했던 비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시면서 돌봤고 다시 치매에 걸렸던 덴버에 사시던 롸저의 부모를 모셔와서 그분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돌봤다. 그때 퇴근하고 집에 와서 청소와 빨래하고 부모님 목욕시키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죽겠다던 그녀는 다음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모실 부모 없는 나에게 당신은 부러운 여자”하고 “부모 잘 모시면 복 받는다” 내 말에 고맙다고 했다. 그 모든 힘든 일을 풀타임 일을 하면서 해낸 그녀를 나는 깊이 존경한다. 소원했던 딸과도 손주들이 태어나면서 화해해서 앞으로 비비의 노후가 평안하리라 믿었다.
그러다 3년 전인가 롸저가 파킨스병 진단을 받은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비비는 다시 힘든 도전에 마주섰다. 변호사였고 금융설계사였던 롸저는 충격을 벗어나자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 차근차근 그의 업무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닫았다. 그리고 씩씩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파킨스병에 적절한 운동을 열심히 한다. 그를 돌보며 올해 자신도 무릎연골수술을 받은 비비는 여전히 교단에 선다.
비비는 나와 동갑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살면서 익힌 비슷한 취향을 나누며 깊게 사귀는 친구다. 어떤 힘든 일도 웃음으로 처리할 줄 아는 그녀와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읽는다.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그녀가 나를 믿듯이 나도 그녀를 믿고 의지한다. 그녀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의 손을 잡아줄 좋은 친구다.
우리가 함께 만든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가슴에 가득하고 죽을때까지 사이좋게 살자던 바램도 여전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바꿔주는 변화와 복병같은 질병에 적응하는 것이 힘든다. 아름다운 가을날 비비와 롸저가 단풍 화사한 넓은 들판을 자전거를 타고 누비던 옛 날들을 떠올리니 썰렁한 바람이 분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통을 감수하는 아름다운 친구에게 겨울이 빨리 다가오지 않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