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들은 예술이나 철학과 같이 고상한 분야에서는 그리스인에게 뒤떨어졌으나, 실용적인 분야에서는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로마 시대에 도시들 사이에는 훌륭하게 포장된 도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도시에 먹을 물이 모자랄 경우에는 돌로 거대한 수도를 세워 물을 공급했다. 로마제국의 도로는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속주들을 수도와 긴밀하게 연결시켜 주었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가 최초로 건설한 도로다. 로마인은 아피아 가도를 ‘가도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로마식 가도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로마 가도는 어때야 하는가의 본보기를 아피아 가도가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피아 가도를 만들 당시의 로마인은 은화조차 주조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많은 인력과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본격적인 공공 공사를 시작했다. 인프라는 경제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가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배상금이 아니라 영토였다. 시칠리아 섬이 카르타고 영토에서 로마 영토로 바뀐 것이다. 당연히 로마인은 시칠리아에 로마식 가도를 깔았다. 시칠리아 섬은, 경제력은 강하지만 가도 건설에는 열성을 보이지 않는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다. 빌레리아 가도는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에 처음 건설된 본격적인 가도였다.
로마 정치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당시 로마 정국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312년부터 307년까지 그는 인구를 조사하고, 세금을 매기고, 주민들의 풍속을 감시하는 중요한 관리인 감찰관을 지냈다. 감찰관으로 일하던 312년에 그는 로마에서 카푸아(나폴리 북쪽)에 이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에 그의 이름을 딴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노폭은 마차 두 대가 지날 정도(4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동원된 공법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땅을 1~1.5m 깊이로 파고 그 바닥에 주먹만 한 돌을 깐 다음 모래와 자갈, 잘게 부순 돌로 채웠다. 평상시에는 말과 마차들이 다니고 전시에는 기마군과 전차들이 질풍노도처럼 내달려서 적군을 막아냈다.
아피아 가도는 처음엔 132마일이었고 자갈로 덮였었다. 그 뒤로 꾸준히 개선되어 폭이 6미터에 이르렀고 돌이나 용암으로 포장되었다. 아울러 계속 연장되어 브룬디시움(지금의 브린디시)까지 닿았다. 브룬디시움은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가는 병력을 태운 배들이 출발하는 항구였다. 로마인들은 열심히 도로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반도는 촘촘한 도로망으로 연결됐다. 도로망의 중심은 물론 로마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로마의 도로는 지금도 그대로 남은 부분들이 많고 서구의 간선도로들의 기초가 된 부분들도 많다. 오늘날 이탈리아 국도 중에는 로마시대 도로를 아스팔트 포장만 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다리는 무려 300개 이상이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반도 내에만 동서남북으로 29개의 간선도로를 건설하는 등 길에 의해 발전을 거듭한 로마제국은 말기에 이르러선 총 8만km에 달하는 간선도로와 7만km의 지방도로를 보유하게 됐다. 속주에 깐 도로까지 합하면 실로 엄청났다. 길은 로마인의 지배영역을 확장한 것만 아니라 사고의 지평까지 넓혔다. 대제국이란 군사력만 갖춘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비견되는 비전을 가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인이 최고의 토목공학 기술로 만든 성과물이다. 로마에서 그리스나 이집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아피아 가도를 지나야만 했다. 아우구스투스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멸한 후 로마로 입성할 때 이 길을 통과했다. 그 후 꾸준한 유지·보수를 받았다고는 하나 2000년 넘게 그 모습을 유지하며 유럽 도로 건설의 모델이 되어 주었으니 로마인이 이 길을 통해 얻고자 한 견고함과 편리함과 아름다움은 모두 성취했다고 볼 수 있겠다.
길은 사람과 물자의 통행을 위해 만든 물적 시설이다.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닦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 길을 통해 적이 쳐들어올 수도 있으므로 길을 지킬 자신이 있는 자만이 길을 건설할 수 있다. 로마는 그런 자신이 있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고속도로에서 조국의 발전과 번영의 길을 찾았다. 그가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들고 나왔을 때 야당은 거세게 반대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반대했다. 그러나 역사는 박정희가 옳았음을 웅변한다. 박정희는 그의 큰 허물로도 초라해지지 않을 큰 업적 하나를 남겼다. 고국을 오랜만에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하는 소식이 있다. 눈부시시게 발전된 조국의 모습이다. 여기에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고속도로망과 사통팔달로 뻗어가는 고속화철도망도 빠지지 않는다.
머지않아 서울-속초가 다시 1시간 생활권으로 좁혀질 모양이다. 강원 춘천시와 속초시를 잇는 동서고속화철도가 착공되었기 때문이다. 동서고속화철도가 개통되면 서울 용산에서 속초까지 1시간 39분이면 주파가 가능하다고 한다. 구절양장 비포장도로를 달려 대관령, 진부령을 넘던 동해 여행은 아련한 추억이다. 그런데 그 멀고 험한 길이 1시간 생활권이 된다니 꿈만 같다. 죽기 전에 한국에 가면 새로 만든 고속도로를 달려 보고 싶다. 동해의 푸른 바다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