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흑인 노예의 자녀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남성이 지난달 세상을 떠나면서 미국 노예사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2일 민권 운동가 다니엘 스미스의 삶을 조명했다. 스미스는 남북전쟁이 끝나기 3년 전인 1862년 백인 노예로 태어난 아브람 스미스의 6자녀 중 다섯째로, 1932년 3월 11일 태어나 지난달 19일 90세를 일기로 숨졌다.
스미스는 어린 시절 토요일 저녁엔 침대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이미 70대였던 연로한 아버지가 형들에게 말해주는 노예 이야기를 몰래 듣곤 했다. 노예 두 명이 손목이 묶인 채 도망치다가 사냥개에 발각돼 교수형을 당했다거나 노예가 거짓말을 했다며 백인 주인이 노예의 가족까지 불러내 강철로 된 마차 바퀴에 혀를 대도록 해서 혀 절반이 벗겨지도록 했다는 식이다. 아버지가 부모에게 들었거나 직접 겪은 이야기였다. 스미스는 생전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울면서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다니엘 스미스는 주한미군으로도 복무했었다. 유튜브 캡처
스미스는 6살 때 시계공장 관리인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뺑소니 사고로 잃은 후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 형은 빵집에서 일하고 남은 빵을 가져왔고, 동생은 의사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했다. 스미스도 고등학생 때 동물병원에서 수의사 보조원으로 몇 시간씩 일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에서 주한미군 의무병으로도 복무했다. 군 제대 후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대학에 진학해 학생회장까지 지냈다가 수의사 꿈을 이루려 앨라배마주 터스키기 대학원(당시 연구소) 수의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곧 학업을 포기하고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노예의 굴레에선 벗어났지만, 평생 인종차별을 당했다. 1957년 YMCA 청소년 캠프 진행을 돕다가 근처 저수지에서 젊은 여성이 물에 빠지자 그를 구해 맥박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인공호흡을 하려고 했지만, 한 경찰관이 “이미 죽었다”며 그를 제지했다. 알고 보니 그 경찰은 피해자의 친척이었다고 한다. 스미스는 “경찰은 흑인 남자의 입술이 닿지 못하게 하려고 친척을 죽게 했다”고 했다.
또 어느 날엔 퇴근길에 백인 우월주의자 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KKK)이 차량으로 자신을 추격해 오는 바람에 주유소 주차장에 부딪혀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그가 빈곤 퇴치 운동을 하면서 사무실로 썼던 교회는 누군가의 방화로 완전히 파괴됐다. 이 교회의 복구 사업을 도운 백인 판사는 그가 소유한 소 21마리가 독살된 것을 나중에 발견했다.
눈물로 지켜본 오바마 취임식
그의 모든 경험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63년 8월 백인 친구와 함께 워싱턴 행진에 참여했다가 마틴 루서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직접 들었고, 2년 후엔 흑인들의 투표권을 촉구하며 진행한 비폭력 행진에 동참해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킹 목사와 함께 걸었다.
그가 꼽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2009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취임식이었다. 군중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취임 장면을 봤다는 그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60년대 흑인 간호사와 결혼해 68년 워싱턴에서 빈곤지역 의료서비스감독기관에서 일했다. 86년 이혼 후 2006년 백인 로레타 노이만과 재혼했다.
94년 은퇴한 뒤에는 워싱턴 국립 대성당 수석 안내원으로 로널드 레이건,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엄수했고, 9·11 테러 이후 제정된 ‘국가 기도의 날’ 등 중요 행사에서 대통령들을 안내했다. 스미스가 생전 집필한 회고록 『노예의 아들: 백인의 미국에서 한 흑인의 여행』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