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9)
몽고메리의 가을은 갈색으로 저문다. 울긋불긋 물든 한국의 나뭇잎과 다르게 같은 상수리나무라도 노란 갈색이 아니라 진한 갈색으로 떨어진다. 갈색은 나무색이라고도 부르는 만큼 나무의 대표적인 색이고 자연과 가까운 색이다. 그래서인지 갈색은 순박하고 성실하고 편안함을 주는 시골집과 할머니를 닮은 색 같다. 색채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색채심리학’에 의하면 갈색은 착하고 순수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온화한 특성이 있다고 한다. 색깔은 사람의 감정과 성격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 보여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What Does Bunny See?〉(사진) 이 책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가장 한국적인 동화를 쓰는 ‘린다 수 박’의 글에 ‘매기 스미스’가 그림을 그린 책이다. 고려청자 이야기를 담은 장편 동화 〈사금파리 한 조각〉으로 2002년 뉴베리상을 수상한 린다 수 박은 〈뽕나무 프로젝트〉, 〈내 이름이 교코였을 때〉, 〈연싸움〉, 〈비빔밥〉 등 한국의 전통과 역사에 깊은 애정을 담은 책들을 써왔다. 〈What Does Bunny See?〉는 유아기 아이에게 꽃과 색깔에 대해 설명하기 좋은 책이다.
아기토끼 베니는 오두막 정원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 빨간 양귀비, 노란 앵초, 보라 제비꽃, 초록 토끼풀, 분홍 연꽃, 주황 참나리, 파란 나팔꽃을 만난다. 그리고 다시 엄마토끼 품속에서 무지개 꿈을 꾸며 잠든다. 이렇게 짧게 요약되는 이야기지만, 베니가 깡충깡충 자리를 옮길 때마다 펼쳐지는 정원의 꽃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그림책을 보면서 나는 색채심리학에서 말하는 색깔들의 특성을 찾아보는 재미를 맛봤다.
빨강은 강한 에너지를 지닌 색으로 식욕을 돋우고, 빠른 심리적 변화를 나타내는 특성을 지녔다. 그리고 꽃말로 찾아본 빨간 양귀비는 위안과 위로를 의미한다고 한다. 실제로 빨간 양귀비는 보고 있으면 숨 막힐 것처럼 강한 끌림이 있는 꽃이다. 노랑은 생동감과 따뜻함을 주는 색이다.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심리가 반영되는 색이라 한다. 노란 앵초는 영원한 사랑, 천국의 열쇠라는 꽃말을 가졌다. 이름만으로도 행복감을 주는 꽃이다. 초록색은 나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색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서 의사결정을 잘 못하고, 함께 있을 때 빼앗긴 에너지를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채워야 한다고 한다. 마치 녹음 무성한 여름을 지나면, 잎을 떨구고 조용히 사색해야하는 나무를 닮은 색이다. 분홍은 사랑과 행복, 청춘과 품위 등 많은 특성을 지녔고, 연약한 소녀 같은 감성이 있어서 상처받기도 쉬운 색이라 한다. 연꽃의 꽃말은 깨끗한 마음으로 더러운 물에서 자라지만 그 꽃과 잎에는 흙 하나 묻히지 않는 모습과 어울리는 꽃말 같다. 파랑은 이성적인 색으로 신뢰감과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아이들 공부방을 파랑으로 꾸민 집이 많은가 보다. 하지만 파랑은 속을 알기 힘들어 보여주는 안정감 속에 우울과 불안이 숨어있을 수 있다고 한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자식 같은 색이다. 나팔꽃의 꽃말은 아침에 피는 꽃이라,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와 함께 허무한 사랑이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나팔꽃에 담긴 중국의 슬픈 전설 때문이란다. 성벽에 갇힌 아내를 보기위해 날마다 벽을 오르던 남편이 끝내 그 벽을 다 오르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이른 아침부터 피었다가 해가 중천에 오르면 시들어 버리는 나팔꽃은 소리라도 전하려 나팔처럼 활짝 피었나보다.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낙엽을 보다가 나는 어떤 나무일까 생각해 본다. 어떤 색깔과 향기와 무늬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나무든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 나또한 나의 나무가 마냥 좋지만은 않아서 가끔은 실망하고 후회하며 되돌리고 싶을 때도 있을 거다. 어쩌면 이게 자연스러운 삶이겠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각자의 의미로 치열하게 잎을 피웠다가, 가을이면 모두 낙엽을 떨구어 시린 땅에 이불을 만들어 주듯이 나를 넘어 자연스러운 숲이 되어가는 것이 우리 삶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