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입구 가까이 의자에 앉아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내 앞에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와서 섰다. 양다리 뒤 종아리에 위에서 아래로 검은 잉크로 굵게 새겨진 문신, “Stay strong” “Never give up” 보고 고개를 들어서 그 다리의 주인을 봤다. 금발의 젊은 남자다. 자신을 위한 각오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메시지를 전혀 엉뚱한 곳에 영구적으로 새겨 넣은 용기가 대단했다.
똑 같은 말을 은행 사무원의 벽에 붙은 포스트에서 보았을 적보다 낯선 남자의 종아리에서 보니 생동감이 있었다. 사는데 필요한 용기를 주는 메시지가 핏줄을 따라 위로 아래로 흐르며 소근소근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새삼 나 자신을 재정비하도록 힘을 준 이 신선하고 재미난 말을 하필이면 종아리에 문신한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낯선 남자의 종아리를 통해서 나에게 다가온 메시지를 음식을 먹으면서 또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생각했다. 이것들도 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생명의 나무에 걸린 현명한 말처럼 가지에 접목됐다. 그동안 동서고금 참 많은 말을 모아서 내 속의 나무는 무성한 잎을 키웠다. 이 잎들은 내가 어떤 일에 직면하면 상황에 적절한 말이 골라져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고 그리고 전신으로 퍼지면서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준다. 더러는 떨어져 잊혀진 것들도 있지만 더러는 성경의 잠언에 있는 지혜로운 구절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13세기 이슬람 문학과 사상의 대 학자였던 잘랄루딘 루미도 나에게 영향을 줬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5년 전이다. 이스탄불 문화원이 이곳 대학의 한 단체와 함께 주선해서 터키의 Whirling Dervishes of Rumi 공연단을 초빙해서 몽고메리에서 공연을 가졌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느냐? 사랑은 나와 우리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떨쳐 나와서 모든 욕구와 미모를 아름다움의 창조자에 귀착케 한다’ 던 광고에 유혹 받았었다. 신과 세상만물에 대한 사랑을 의식화한 8백년이상 이어온 이슬람 수니파의 종교의식은 생경했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특이한 모습의 전통악기로 낯선 언어의 시가 구성지게 울렸던 수피 음악공연은 일정한 선에서 절제되고 차갑게 조정된 감정이 좋았다. 세상만사와 우주의 섭리가 균형의 화음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줬다. 마치 먼 곳에서 경 읽는 소리 같은 은은함을 줘서 그 시의 내용을 알고 싶었다.
그때 인간존재의 기본상태가 선회함을 표현한다는 수피 댄서도 처음 봤다. 수도사들이 음악에 따라 천천히 돌다가 속도를 높이며 빠르게 뱅글뱅글 도는 예식에 그들의 하얀 의식의 복장, 넓은 치마폭이 원형으로 퍼지면서 무대에 비춘 색깔에 반사되어 환상의 그림을 그렸다.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아래 땅을 향한, 양쪽으로 벌린 팔들이 몸의 균형을 지키는 동안 왼발은 제자리서 돌로 오른발은 재빨리 360도를 돌고 돌았다. 음악의 리듬이 바뀌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빠르게 도는 것을 여러번 번복하는, 자연의 모든 존재와 조화를 이루며 마음과 가슴 그리고 몸이 영적인 여행을 하며 모든 인간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는 의식이라 했다. 그저 보는 것도 어지러웠던 돌고 도는 움직임을 수도사들은 가볍게 치루었다. 많은 연습을 했을터지만 그들의 기도하는 마음이 그렇게 오랫동안 돌고 돌아도 서툰 걸음 안하고 반듯하게 제자리에 설 수 있는 것 같았다. 믿음의 엄청난 위력이어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날 음악과 댄서를 통해서 우주의 섭리와 신의 사랑을 추구하며 땅 위의 평화를 위하여 많은 기도를 드리는 나와 다른 종파의 한 일면을 본 후 한동안 그 모든 것의 근본인 루미의 철학에 심취했다. 삶의 지혜를 심플하고 아름답게 풀어주는 루미의 사상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인간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내가 믿는 종교와 놀랍게도 완벽한 일치였다. 그후부터 가끔 나는 루미를 찾아 고요한 명상의 시간을 가진다. 그의 어록 중에, “당신이 찾는 것은 당신을 찾고 있다” 와 “세상이 당신을 무릎 꿇게 한다면 당신은 기도할 완벽한 장소에 있다” 얼마나 멋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