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몽고메리의 단풍을 바라본다. 몸에 지닌 색의 기운을 있는 대로 뿜어내는 추색의 향연을 보니 몽고메리에도 이런 풍경이 있었던가. 수년을 보아왔지만 단풍이 이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올해의 늦단풍은 그 어느 해도 따라올 수 없을 한 폭의 그림이다.
무리 지어 숲을 이루는 화려한 단풍은 아니지만 집 앞의 길목에서 만나는 가로수들과 집집마다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는 나무들, 쇼핑몰 주차장 칸막이가 되어있는 나무들까지 제 각각의 색들을 빛내고 있다. 이 감동을 그려보고 싶은 생각에 캔버스를 앞에 놓고 마주하지만 겨울잠을 준비하는 이 절기에 생의 마지막인 듯 저토록 치열하게 불타오르는 순간을 어떻게 화폭에 담을 수 있을까? 붓을 놓고 곧 사라질 풍경속으로 더 깊이 빠져본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캔버스를 보고 있으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기대감에 설레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계절의 한 순간을 화폭에 옮기고 싶다는 느낌이 들고 내 눈앞에 깊은 인상으로 들어오는 대상을 어떻게 잡아 화폭에 옮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면 나는 이따금 나를 잊고 마주하는 풍경에 몰입한다. 내 속에 펼쳐졌던 여러 감정들을 붓끝에 모아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며 희망과 절망을 맛보기도 하지만 결과에 대한 만족 보다는 그 과정에 묻어 있는 숱한 감정의 색들에 위로 받는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어머니들과 함께 수업을 하면 이따금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떻게 연필을 쥐어야 할지, 어떻게 붓질을 시작할지. 한없이 커 보이는 캔버스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망설이며 다가서는,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색들을 입혀 가는 어머니들과 함께 하면서 나는 어머니 한 분 한 분에게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얻어진, 다양한 색들로 채색되고 보관된 다양한 삶의 경험들과 그동안 잊고 살았던 여린 감성들이 섬세한 촉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가슴속에서 잠자고 있던 미적 감정이 고개를 들고 노크하는 순간이다.
작업실의 열기가 달아오른다. 고향을 떠나와 앞만 보고 치열하게 삶을 끌고 왔던 젊은 날. 이제는 가물거리는, 그러나 숨죽이며 살아있던 그 젊음 속 깊이 묻어 두었던 하나의 열망이 작업실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꽃과 나무를 그려본다. 자화상을 그려보고, 손자 손녀들, 그리고 집 앞의 풍경과 식탁위의 풍경도 그려본다. 비록 표현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 묵직한 삶의 깊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어머니들의 자세는 진지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제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그림에 몰두하며 새로운 색들을 붓 끝에 묻혀서 입혀가는 그 과정을 보면서 나는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연배가 높은 분일수록 붓질 하나에도 감사하며 행복해하신다. 그분들을 볼 때마다 나는 작은 일 하나에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연륜의 지혜에서 또 다른 배움을 얻으며 감사한다. 하얀 도화지에 때 묻지 않은 색들을 채워 나가는 해맑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도 의미 있지만 그 농익은 색들을 꺼내기 위해서 갖가지 몸짓들로 붓을 드는 다양한 연령의 성인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내게 더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일까. 어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면 나는 그분들 속에서 조금씩 익어간다는 생 각이 든다.
나는 가끔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자식들이 나를 가슴속까지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으로 취급하면 서럽다. “너희들도 내 나이가 되어봐야 알겠지. 나이가 들수록 군더더기 버리며 여백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너희들이 어찌 알까? 비우는 연습을 하고 여백을 만들어가며 아직도 너희들 못지않은 열정을 다듬어서 새롭게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니? 그동안의 농익은 색으로 덧 칠을 하며 내 맘에 드는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 더딘 붓질로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는 것을.” 애잔한 마음으로 나는 다시 단풍을 바라본다. 늦었기에 처연하리 만치 붉은 피를 토해내는 늦단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