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박사가 쓴 ‘윤치호 선배를 기리며’라는 책이 출판되고,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오자, 하루만에 다 읽었다. 1900년대 한일 합방시절 궁중과 정치 일선에서 일어난 일들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며 일기로 써 놓은 것을 읽으니, 당시의 그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재미있게 한숨에 다 읽었다. 60년간 쓴 윤치호 선생의 일기를 유네스코 유산 기록물로 등재 시키려 준비중이라고 한다.
유태인 소녀가 쓴 일기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나치독일의 유태인 학살사건의 실상을 한 소녀의 일상 생활 속에서 자세히 보여주기에, 그 일기가 발견되자마자 세계적인 각광을 받았듯이, 윤치호의 60년간 일기는 한일 합방 당시의 조선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일본일들이 조선에 대한 일들을, 정부의 한 간부로 직접 경험한 것을, 미국에서 유학을 한 지식인의 눈으로 보고 기록한 실제상황이기에, 당시의 궁중의 실생활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아 참신한 느낌이었다.
일기에 기록된 고종황제의 행동도 흥미롭다.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의 이권을 차지 하려고 제물포에서 총격으로 싸울 때, 무당의 말을 듣고 궁궐 안팎에서 가마솥을 꺼꾸로 땅에 묻었다. 일본을 망하게 하려고 무당의 말을 듣고 일본지도를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끓였다. 끓는 물 속에서 너덜너덜 으깨어진 일본 지도를 보며, 고종황제는 마음의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죽은 명성황후를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자,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송광호라는 사람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명성황후의 묘를 명당으로 옮기느라 엄청난 국고를 썼다. 송광호는 궁중에서 높은 벼슬 협판까지 올라갔다.
1901 년에는 안 영준이라는 자가 지리산 줄기가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이어졌는데, 그 맥을 파서 끊으면 일본은 자멸한다는 소리를 듣고, 고종은 지리산 자락 땅을 파서 맥을 끊었고 안명준은 현풍 군수가 되었다.
윤치호의 일기 속에 보이는 고종황제의 그런 행적은 의외였고 애석한 마음이 든다. 한일 합병을 전후한 일본의 지도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인터넷에 찾아보니, 명치 천황이었다. 그는 명치 유신이라는 혁명적인 개혁을 했고 그 골자는 전통적인 사회계급을 국민의 평등으로 바꾸고, 민주주의의 정치 방식으로 국회를 개설하고, 대일본제국 헌법을 발표했다. 공업을 발달시켜 부강한 제국주의로 변한다. 화약 총포는 물론이고 미국 함대를 자살폭탄으로 쓸 비행기도 만들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로 변한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이기고 타이완을 점령하여 대륙진출의 발판을 삼았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조선에서 구하려 조선을 넘보는 러시아와 전쟁을 하여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은 조선과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어 정복이 아닌 두 나라의 합의적인 통합같이 꾸몄다.
고종황제 중심의 조선 조정은 무속인들이 궁중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라는 새로운 혁신이 일어났는데 왜 그랬을까? 그 배경에는 1854년 미국과 일본간의 화친 조약이 영향을 미쳤다. 일본과 미국이 화친 조약을 맺은 것은 동인도 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제독이 일본 개방을 강요할 때 힘이 부족하여 강제로 맺은 조약이었지만, 일본은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아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하여 명치유신으로 이어졌다.
36년간의 일본의 압제에서 조국이 해방된 것은 1945년 8월 15일이다. 바로 그날 일본 쇼와 천황은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한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그 서류속에는 일본이 전쟁에 항복하고, 점령한 나라를 모두 해방시킨다는 내용도 있다. 내가 배워 온 역사 속에는 수많은 구국 투사들과 애국열사들이 일본으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려 목숨을 바쳤다. 일본 천황이 항복한다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서 우리나라는 독립한 것은 분명한데, 그 많은 순국열사, 애국자, 독립 운동가들이 조국의 해방에 기여한 정도는 실제로 얼마나 될까?
해방후에 가난과 전쟁을 거치면서도 지금처럼 잘사는 조국, 역사속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세계 6위의 경제 강국으로 발전된 나라를 만든 국민을 교육을 통하여 준비시킨 윤치호 같은 선각자들도 어떤 의미에서 애국자가 아닐까?
나는 오랫동안 일본을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고, 일본이 상대라면 치를 떨었고, 유학시절 일본학생들과 축구시합이라도 하면, 기필코 이기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책 속에서 윤치호의 일기에 비친 고종황제의 궁중 분위기를 보니, 일본을 원수로 증오해서만 될 일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지금은 국제법이 있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범할 수 없고, 나라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가지만, 그땐 그런 국제법도 없었고 우린 약해서 당했기에 우리의 탓도 있고, 계속 일본을 미워만 한다고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