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1865년 4월 9일 리치먼드가 북군에 함락되면서 4년여에 걸친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그 피해는 엄청났다. 북군 36만, 남군 26만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민간의 사망자수는 그저 수백만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특히 남부는 전쟁의 여파로 농토와 가옥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의 더 큰 피해는 다른 데 있었다. 남북간 그리고 인종간 증오와 적대감의 골이 전쟁으로 인해 회복불능으로 깊어져 버린 것이다. 특히 싸움에서 진 남부에서는 사랑하는 가족과 집, 농토를 빼앗아간 ‘양키놈들’에 대해서는 물론, 신분 해방을 외치며 거들먹거리는 흑인들에 대한 증오감이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KKK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인종 테러단체가 등장한 것도 바로 남북전쟁의 후유증이었다.
이런 사정은 정도는 다르지만 북부도 마찬가지여서, 흑인을 짐승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 때문에 전쟁까지 일으킨 남부 ‘반도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극우 강경론자들이 의사당과 정부와 언론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요컨대 전쟁 직후 미국의 분위기는 이런 적대감이 극도로 만연되어 과연 미국이 전쟁 이전의 일체감을 회복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에 재선된 링컨은 어깨가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1865년 3월 4일, 두 번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링컨은 관용과 화해로 남북이 다시 하나가 될 것을 국민들에게 간곡히 호소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말고 모두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의의 확고한 신념으로써 우리의 남은 일을 끝마치도록 합시다. 조국의 상처를 치료하고 참전용사와 그들의 유가족을 도와줍시다. 우리 가운데 의롭고 항구적인 평화를 이룩하고 이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도록 합시다.”
리치먼드 함락 직후인 4월 11일, 링컨은 대국민연설을 통해 남부동맹에 가담했던 주들이 다시 복귀한다면 전쟁에 따른 어떤 보복이나 불이익도 없을 것임을 천명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때로 적에게 가혹할 수밖에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링컨은 미움과 보복을 싫어하는 양심적 기독교인이었다. 조국의 갈가리 찢긴 상처는 오직 용서와 관용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믿음이었다.
그러나 어찌 예측했으랴. 자신이 바로 그러한 미움과 보복의 희생양이 될 줄을. 화해를 호소하는 대국민연설을 한 지 불과 사흘 후에 링컨은 한 극렬 남부주의자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링컨은 백악관 부근의 한 극장으로 연극 구경을 갔다. 연극이 한창 진행되는데 돌연 대통령이 앉아있던 귀빈석에서 총성이 울렸다. 권총을 손에 쥔 한 남자가 귀빈석에서 무대로 뛰어내리며 “독재자는 죽었다. 남부 만세!”를 외쳤다. 그가 무대 뒤로 도망쳐 사라졌을 때야 사람들은 대통령이 총에 맞았음을 알았다.
향할 곳 없는 분노와 증오가 배회하고 있다. 그 중심에 정치가 있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온갖 명분으로 포장을 씌운 증오의 선동에 앞장서고 있다. ‘윗물 탓일까. 모두의 상처 보듬어야 할 성직자들까지 가세한다. 성직자들이 대통령 부부의 죽음을 기도했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정화수 앞에서 자식의 무사를 비는 어머니 같은 마음이었을까? 타인의 소원 성취를 위해 굿판을 벌이는 무속인 같은 책임감이었을까?
가톨릭 신부는 ‘비나이다 비나이다’란 문구와 함께 비행기가 추락하는 풍자 만화를 인용했고, 성공회 신부는 ‘추락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며 노골적으로 소망을 표현했다고 한다.
누구든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고 자기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미워도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사제라니. 더구나 그 소망이 너무 간절한 탓에 조종사와 승무원, 기자단 등 많은 사람들이 전용기에 함께 타고 있다는 사실은 깜빡한 모양이다.
인터넷 언론 ‘더 탐사’는 채용공고를 내면서 “윤 ·한이 때려죽여도 싫은 분”을 뽑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장관을 무조건 증오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겠다는 뜻이다. 이 조건은 민주당 극렬 지지층 정서와 일치한다.
하루라도 화 안 내면 손해 본다. 분노의 금단현상이다. 사회학자들 표현대로 ‘세계 유일의 화병(Hwabyeong)이란 걸 지닌 앵그리 사회’의 민낯이다. 증오의 앙금인 우리의 한 해 고소·고발은 49만 건으로 일본의 50배다. 조국 사태 직후인 2020년 12월엔 정치권의 소송 남발로 월 5만 건을 넘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역대 최고였다. 이념·지지정당·빈부·남녀·학력·세대·종교 등 7개 항목의 갈등 체감지수가 모두 1위(영국 킹스칼리지, 2021년 조사)인 세계 선두권의 오명으로 이어져 왔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단지 자신의 공허한 삶에 의미와 목적을 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묻지마 증오’의 전사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설령 정의를 표방한 증오일망정 그들에게 그런 명분은 부차적인 것일 수 있다.
증오를 발산하거나 배설하는 재미없이 정의를 위해 헌신하라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설득도 하고 호소도 하라고? 그렇게 할 사람은 거의 없다. 증오의 발산이 우선이다. 증오를 먹고사는 정치인들은 책임을 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사전에 ‘책임’이란 단어는 없다. 그들이 밀어붙인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그건 자기들의 문제가 아니라 반대편의 음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품격도 습관이다. 한국 정치 74년, 민주화 35년. 이런 사례를 떠올리기조차 힘들다. 마음속에 믿음이 아로새겨진 공감과 존중, 통합의 기억이 별로 없다. 사람과 사회, 국가의 품격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부디 후대들이라도 품격 사회의 시민 대접 받도록 해줘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나라의 운명 좀 생각하며 사시라. 정치인들이여. 우리 모두를 위한 타협과 협력의 의지가 충만한 사람들을 둘로 쪼개 나라 망치기에 딱 좋은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만 키워서 좋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모두 각자 가진 소신과 신념을 좀 유예하면서 타협과 협력의 길로 나아가는 대전환을 이루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