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배마서 안과 의사로 기반 다지고
암 환자 돕다 체계적 양로 복지에 관심
열정 아내 기려 고고학 연구기금 기부
다음 꿈은 북한에 종합의료센터 건립
미선헬스서비스 김한선 대표가 지난 11월 서울대 고고학과에 15억원을 기부했다. 지난해 갑작스럽게 별세한 아내 김서영 박사 1주기를 맞아 고고학 분야에 대한 고인의 애정과 열정을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안과 의사 출신의 김한선 박사는 2006년 조지아주 한인 최초의 호스피스 병원을 설립한 데 이어 2020년엔 로렌스빌에 대형 너싱홈 재활센터를 오픈했고, 지난 10월엔 스와니 인근에 대규모 생활형 요양시설 기공식까지 가져 주목을 받았다. 김 박사의 서울대 기부 소식이 들려온 날, 미선헬스서비스 사무실에서 김한선 박사를 만났다.
– 한국 돈 15억 원이면 100만 달러가 넘습니다. 어떻게 서울대 고고학과에 기부할 생각을 했는지요?
“아내가 기뻐했을 겁니다. 고고학에 대해 애정이 깊었거든요. 원리 물리학도였지만 은퇴 후 우리 역사와 뿌리를 찾는데 관심이 많았어요. 고고학 연구를 위해 직접 산스크리트어까지 공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지난해 11월 작고한 김 박사의 부인 김서영씨는 경남여고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과 독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앨라배마 탤러디가칼리지에서 물리학 교수로 일하다 은퇴했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동기 모임을 위해 매년 한국을 방문할 정도로 동문회와 모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조지아 동창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로렌스빌에 있는 미선헬스서비스 통합 건물. 오른쪽 앞이 호스피스 병동, 뒤에 보이는 2층 건물이 재활센터다.
– 한국에서 고고학 같은 기초 학문 분야에 흔치 않은 기부였을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학교서 많이 놀라더군요. 고고학과 단일 기부로는 역대 최대라고 들었습니다. 기부금은 ‘김서영 고고학 학술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심포지엄 개최, 장학금 지급 등 한국 고고학 연구 저변을 넓히는 데 사용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용처를 부탁했습니다.”
– 아내 사랑이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사랑이라기보다 평생 동반자였던 사람에 대한 내 방식의 도리였습니다. 인도 무굴제국 황제가 죽은 아내를 위해 세계적인 건물 타지마할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어도 저도 아내가 좋아했던 일을 후학들이 계속 발전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 부인 김서영 박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공부에 욕심이 많았고 매사에 열정적이었습니다. 제게는 대화가 통하는 친구 같은 아내였고요. 어떤 분야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물질적 세속적인 것보다는 의미와 가치, 보람을 더 중요시했다는 점에서도 뜻이 맞았습니다. 평생 아침을 해 주었고 밥 먹을 때는 꼭 내 옆에 앉아 있어 줬네요. 찌개도 참 잘 끓였는데…,너무 빨리 갔어요.”
– 많이 생각나시겠습니다.
“제가 텍사스 휴스턴에서 의과대학 다닐 때 처음 만났습니다. 50년 전이었네요. 주삿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여자가 한국서 왔다고들 소문이 났는데 알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별 관심을 안 가졌지만 한국 학생이 적다 보니 가끔 모이곤 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제가 고물차를 몰고 있었는데 가끔 라이드를 해주면서 친해졌어요. 몇 년 뒤 아내는 선을 보기 위해 가끔 한국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공항 라이드와 픽업도 해 줬습니다. 하지만 계속 선을 봐도 결혼이 이뤄지지 않아 그때마다 조언도 해주고 하다가 우리 둘이 가까워지고 결혼까지 하게 된 겁니다. 아내가 저를 먼저 좋아했던 것 같아요. 대화가 통하고 저를 전폭적으로 이해해 주는 아내가 저도 싫지 않았습니다.”
김 박사는 텍사스에서 의대 졸업 후 아내와 함께 독일로 유학을 가서 박사 공부를 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왔다. 이후 김 박사는 앨라배마에서 나사(NASA) 연구원으로 5년 가까이 일하다 안과 병원을 개업했고, 부인 김서영 박사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김한선-김서영 박사 부부의 다정했던 한때.
– 안과 의사 시절은 어땠나요?
“의대 졸업은 했지만 바로 의사 가운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독일에서 5년을 더 공부했거든요.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는 나사에서 우주의학 분야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중력과 진동의 변화 따른 몸의 변화, 산소 결핍 시의 신체 반응 같은 연구를 했는데 무척 재미있었어요. 아내도 제가 그런 일을 하는 걸 아주 좋아했고요.
당시 제 연봉이 약 6만5천 달러였습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애도 키우고 한국도 자주 가고 하다 보니 늘 빠듯했습니다. 돈이 더 필요했어요. 그때 마침 친구와 뜻이 맞아 동업으로 안과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이후 수입은 안정적이 됐지만 몸이 힘들었습니다.
얼마 뒤엔 저 혼자 병원을 맡게 됐는데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고용 의사를 더 들이고, 병원도 늘려 9개까지 운영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입도 늘고 개인 시간도 더 갖게 됐어요. 그때부터 투자도 하고 봉사나 후원 등 사회 활동도 더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때 맺은 인연들이 지금 시니어 복지 관련 일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 이곳에 와서 보니 호스피스 병원뿐 아니라 초현대식 너싱홈 재활센터까지 규모가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시작하셨나요?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잡고 보니 어느새 소명처럼 된 것이지요. 제가 마라톤을 좋아하는데 앨라배마에 살면서도 애틀랜타에서 열리는 대회에 자주 참가했습니다. 2005년 무렵인가 그때도 대회 참가 차 애틀랜타에 왔다가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말기 암 환자 2명을 돕게 되면서 한인 시니어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한 자선이었는데 돕는 인원이 늘고 비용 부담도 커지면서 아예 호스피스 병원을 하나 세우면 더 많은 한인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인들 많이 사는 조지아 귀넷카운티에 호스피스 병원을 시작한 겁니다.”
김한선 박사가 지난 10월 스와니H마트 인근에 생활형 요양시설 기공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한선 박사가 2006년 설립한 미선호스피스는 조지아주 최초의 한인들을 위한 호스피스 병원으로 2011년 로렌스빌(88 Johnson Rd., Lawrenceville, GA 30046)에 새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20년에는 호스피스 병동 뒤에 6만 2000스퀘어피트 규모의 너싱홈 재활치료센터(Mesun Skilled Nursing Rehabilitation Center)도 준공했다. 이곳은 지상 2층 지하 1층에 100여개의 병상을 갖춘 초현대식 시설로 한인을 비롯한 아시안 시니어 중증 환자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또 지난 10월에는 스와니H마트 인근 9.7에이커 부지에 87 베드 규모의 생활형 요양 시설 ‘미선어시스티드 리빙 퍼실리티(Mesun Assisted Living Facility)’를 착공했다. 약 3000만 달러의 공사비가 투입돼 내년 말 완공 예정인 이곳은 실버타운과 요양병원을 합친 개념으로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비중증 노인 환자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다.
미선호스피스의 미선(Mesun)은 한자로 아름다울 미(美), 선택할 선(選)자로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뜻이다. 영어 스펠링으로는 나와 태양, 독일어로는 에너지를 뜻한다. 인생의 바람직한 마무리를 돕는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 수천 만 달러가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를 척척 해내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김한선 박사가 참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가난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대단한 부자도 아닙니다. 또 돈이 있다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이런 일은 무엇보다 왜 이 해야 하는가 하는 열정(Passion)이 있어야 합니다. 그 열정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자원(Resource)을 묶어내는 능력도 필요하고요. 저도 이 일을 하면서 자금 조달, 법률적 제도적 문제 해결 등 허가부터 준공까지 끊임없이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끈기로 버티며 여기까지 왔어요. 그때마다 지인들의 신뢰가 큰 힘이 됐습니다.”
김 박사는 그간의 고충을 이야기하면서 금융인, 법조인, 정치인 등 앨라배마에서 쌓아온 미국 인사들의 도움을 고마워했다. 김박사는 앨라배마에서 제법 돈을 잘 버는 것으로 소문났을 때도 1600스퀘어피트 남짓한 자그마한 집에서 살았다. 차도 오래된 픽업트럭을 몰았다고 한다.
그만큼 검소했다는 말인데, 미국 친구들이 그래서 더 자신을 신뢰했던 것 같다고 했다. 김박사는 지금도 앨라배마의 그 집을 오가며 지낸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스와니에 대규모 생활형 요양시설 기공식을 가졌다.
– 하시는 일들이 보람이 클 것 같습니다.
“미선의 직원이 지금 약 160여명입니다. 리빙 시설이 완공되면 또 80명이 더 늘어납니다. 모두 의사, 간호사 등 전문인들이고 한인 말고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일합니다. 시설도 환자 대우도 최고로 하고요. 이런 규모나 시설을 보면서 한인들이 다들 놀라십니다. 젊은 친구들도 뿌듯해하고요. 저로서는 그게 보람입니다. 한인들은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나름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젊은 친구들은 저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도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거니까요.”
– 끝으로 부인을 먼저 보내고 1년이 지났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시간이 참 많아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늦게 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좀 더 자주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 미국에 왔을 때, 또 의사가 되었을 때 나는 무슨 꿈을 꾸었던가를 생각하고 또 얼마나 그 꿈을 이루었는지도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오래전 꾸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또 다른 꿈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그 꿈을 위해 조금씩 준비하고 있어요.”
김박사가 말하는 새 꿈은 북한에 종합의료센터를 짓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꾸기 시작했다는 꿈이다. 김 박사는 당시 정상회담 직후 북한의 안과 의료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안과학 교실에 1억 원을 기증한 바 있다. 1942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개업한 장인 김승곤씨의 이름으로였다.
22년이 흐른 지금 김 박사는 요즘 북한 종합의료센터 꿈을 구체적으로 다듬어가고 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헤쳐 나가야 할 일이 많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자신이 있다. 지금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그랬듯이, 여전히 열정이 있고 그 일을 하기 위한 리소스도 잘 엮을 수 있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 사는 한국인 의사로서 통일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준비해야지요. 매사에 열정적이었던 아내도 분명히 좋아할 겁니다.”
◇김한선 박사는….
미선헬스서비스 대표. 1948년생으로 경남 밀양이 고향이다. 지금도 어릴 때 뛰놀던 남천강을 그리워한다. 경북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 와 텍사스에서 의대를 졸업했다. 독일에서 박사 학위 취득 후 나사에서 근무하다 앨라배마에서 안과 병원을 9개 운영했다. 달리기가 취미로 버밍햄 마라톤 대회 풀코스를 3시간 40분에 뛴 기록이 있다. 부인 고(故) 김서영 박사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하버드대학 졸업 후 동부의 한 의과대학 교수로 있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 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