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키 인디언 우화에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부드러운 하얀 늑대와 욕망과 집착에 찌들은 공격적인 검은 늑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격렬하게 부딪히며 지칠줄 모르고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 한다. 그 두 마리 늑대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오며 우리의 삶은 그치지 않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분의 끊임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X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흑인을 위한 인권투쟁에 평생을 헌신했다. 하지만 오늘날 킹목사는 흑인들의 메시아로 칭송되며 삶의 모델로 대두되었고 말콤은 폭력투쟁의 선동자로 낙인 찍혀 박물관의 유물로 간신히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흑인 인권 해방이라는 큰 물줄기를 타다보면 그 둘은 떼어낼 수 없는 상호 보완의 관계였다. 이들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따라 요동치는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신념이 최대의 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뜨겁게 살았다.
말콤의 과격한 대응은 킹목사의 인도적 흑백 통합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며 응징없는 대응에 분노하는 대중을 끌어 모아 강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말콤 역시 킹목사의 비폭력 덕분이었다. 마치 서로를 증오하듯 반대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기실 하나의 통합된 에너지가 되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어 보이는 극명한 선과 악이 서로 뒤엉켜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선과 악의 대비, 흑백의 논리는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신화와 우화 등 모든 문화권애서 사용되어 왔으며 지금까지도 채택되는 단골 주제다. 다만 선이 승리한다는 단순한 결말에서 벗어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많은 다양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악인의 비극에 동참하여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사회나 제도의 희생자가 된 사람의 잘못된 선택에 동조하기도 한다. 소위 해악이라고 생각해 온 이런 것들에 마음 한켠을 내주는 우리네 심정은 무엇일까? 자기 연민, 동질감, 바로 그곳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늑대들의 전투현장 한 가운데 서 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요 가장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이 되기도 한다. 방금전 하얀 늑대의 어루만짐에 위로받다가 곧바로 분기탱천한 검은 늑대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하루에도 수 없이 반복한다. 하지만 결국 이 두 마리 늑대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갈등에 빠진다. 이때 선인도 악인도 아닌 우리를 위해서 가시관을 쓰신 그분을 생각하게 된다.
늑대 이야기에 어린 손자가 묻는다 어느 늑대가 이기냐고. 지혜로운 할아버지는 답한다.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다고. 우리는 하얀 늑대에게 먹이를 줘야함을 알고 있다. 그래야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 손자는 다시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럼 검은 늑대는 죽어요? 할아버지가 신과 같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아니. 검은 늑대는 하얀 늑대가 죽지 않는한 영원히 죽지 않는단다. 두마리가 아닌 한마리거든.
하느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보여주시고 회개하라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선과 악, 희고 검고를 보지 말고 이둘을 잘 조화시켜 눈부시게 빛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라는 말씀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이 말씀하신 회개이며 부할이고 십자가의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분의 참뜻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나는 너희를 영원히 기다리고 있단다.
언덕위 나무그늘에 그분이 앉아 있다. 오랜 기다림에 지친 모습에는 검은 그림자가 된 안타까움이 진하다. 고개를 떨구고 있지만 실망의 눈물은 아니길 바래본다.
저 멀리 두 마리 늑대가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달려와 안기는 꿈을 꾼다. 경사진 산구릉을 구르며 그들은 셋이었다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더니 눈부시게 빛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한다. 하늘은 푸르러지고 나무는 초록을 되찾고 이슬 내린 잔디의 싱그러움이 햇빛아래 별처럼 반짝인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그분의 참뜻을 따르리라 다짐한다. 하늘이 화답하듯이 바람 한점 보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