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 사는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두 자녀가 시카고에서 자리잡고 사니, 자기네 부부만 돌아와야 하는데 노년에 자식들과 이역만리 떨어져 사는 것도 자신이 없다고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져간다고 하소연을 한다. 아마 미국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고민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LA 살던 친구는 두 딸들이 미국에 살고 있지만, 상관 없이 부부만 한국에 들어 왔다. 자신들의 나머지 인생을 원하던 대로 살고 싶다며 귀촌해서 잘 살고 있다.
나의 경우는 딸은 한국에 있고 아들은 미국에 있어서 어차피 한 자식은 떨어져 살아야 했는데 딸과 친구들이 있는 한국을 택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과감하게(?) 결정한 아들네와 이별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네가 보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시카고 친구가 고심하며 귀국 결정을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예전의 부모들은 나이 들어가면서 자식을 의지하고 살기만 하면 되었지만 요즘 부모들은 기운이 다하기 전까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는 분위기다. 많은 것을 누리며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맞벌이 하며 나름대로는 힘들어 하는 자식들을 위해 손주들 키워 주는 일이라도 한 몫을 거들려고 하는 것이다.
자식들도 당연히 미더운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어한다. 손주까지 키워 줄 필요가 있냐고 할지 모르나, 잠잠할 만 하면 매스컴에서 어린이 집이나 개인 시터의 어린이 학대가 보도되고 하니 남에게 맡기라고 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다. 사실 후손을 잘 키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소멸해 가는 부모의 시간을 희생해서 새싹을 잘 키우는 것이 보람된 것인지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기에 부모 자신들만을 위해서 써야 하는 것이 옳은 건지 잘 모르겠다.
정답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생각대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방향을 택할 것이고 그래서 삶은 다채로운 것이니 말이다.
늙어가는 부모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건강한 시기를 손주 키우는 일에 쓰고, 그나마 남아 있던 힘이 바닥나면 바로 요양원에 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상대가 자식 아닌가. 자식들이 이런 부모 마음을 알 리 없다.
보고 싶어서 생병이 날 뻔한 아들네는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뜻하지 않은 한국 발령 덕분에 당분간은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소년처럼 자란 손자와 깜찍한 손녀는 가슴을 벅차게 한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낯선 존재일 뿐임을 알면서도 사랑이 넘친다. 평범한 아이들임을 알면서도 괜히 자랑스럽다. 내게도 손주 돌보기를 자처할 수 밖에 없는 팔불출 기운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나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딸네 집과 가까이 살면서 요즘 한국에서 대유행(?)인 손자 돌보기를 하고 있다. 일주일에 이틀만 외손자 아이의 어린이 집 등, 하원을 도와주고 있는 정도지만 그 조차도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주고 싶은 이 부모 노릇은 대체 언제까지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이가 들면 아는 것이 많아지고 지혜로워져야 하는데 점점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것 같다.
한국에 온 후, 소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계획도 했다. 복잡한 서울을 떠나 소도시로 가서 산책도 하고 조용함을 즐기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어떤 일인지는 비밀이다)을 하면서 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다지만, 결국은 자식들에 대한 지나친 염려인지 배려인지 때문에 나의 계획을 당분간 미루게 되었다. 미룰만한 시간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미루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