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물론 그 선택의 결정과정은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
결정 과정의 어려움을 이론으로 정리한 것 가운데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가 있다.
실례로 제동장치가 망가진 전차가 달리고 있다. 선로 위에는 5명의 사람이 있어, 운전자가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된다. 그런데 선로를 바꾸려고 하니 그 선로 위에는 다른 1명이 서 있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이 문제는 윤리학에서 가정하는 사고 실험의 하나다. 많은 사람들은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쪽에 손을 들지만, 과연 그럴까?
희생되어야 할 사람이 자신의 자식이거나 부모라면 과연 쉽게 동의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유명한 장기이식 사례가 등장한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그 병원에는 에이브라함 링컨 같은 위대한 정치가, 슈바이처 닮은 의사,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 인류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공학자가 각각 시한부 질병으로 입원해 있다.
이들 4명의 위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의 장기를 떼어 이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를 떼어 내면 건강한 사람은 죽는다.
당신은 이들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다. 병원의 보안시설은 완벽해서 건강한 환자의 장기를 모두 떼어낸다고 해도, 이는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고, 사회의 불안도 초래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과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트롤리 딜레마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하버드대 교수가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언급하면서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런 딜레마 상황은 현실에서 많이 부딪친다. 이민문제, 백신 의무화, 총기 자유화 등 초미의 사회 관심사들도 이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피할 수 있으면 멈추거나 돌아갈 수 있으면 최선이다.
문제는 민주주의는 항상 선택을 요구하고, 그 선택은 반드시 어떤 희생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휴스턴 클리어 레이크 대학(university of Huston Clear Lake)의 이세형 정치학 교수는 이와 관련, “민주주의는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어떤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것의 희생을 감수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에 따라 “민주주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며, “상대방을 배려하고 조금씩 양보하면 의견차를 조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떻게(How)”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원론에는 공감하지만 각론에서는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정의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강조한 샌델 교수도 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중용(中庸)에 따르면 군자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시중(時中)을 두고 행동한다. 시중은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반면, 소인은 변화와 융통이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며 욕망이 지나치다. 얼핏보면 시중인 것 같지만 사실은 중용에 역행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이나 한국이나 상황을 보면 너무나 소인배 정치가 판치는 것 같다.
한화큐셀의 조지아 투자성과를 둘러싸고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공치사는 그래도 애교다. 워싱턴 정가와 한국의 여의도 정치판은 ‘웃픈(웃기고도 슬픈)’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어디 정치판 뿐이랴. 우리의 주변을 둘러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은 확증편향적 소인배 사고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번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것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재고할 수 있는 유연성도 부족하다.
유명 TV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하는 말이 떠오른다. “이게 최선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