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80년대 은막을 장식했던 영화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가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영화계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간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오던 윤씨는 이날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한국시간으로)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가족들이 공개를 꺼려 더 이상의 얘기는 없을 거 같다”고 전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17 국가브랜드 컨퍼런스 시상식에서 예술부문 대상을 수상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의 부인 배우 윤정희 씨가 자리에서 의원들의 축사를 듣고 있다.왼쪽은 백건우. 2017.2.22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선대 영문학과 재학 중 신인배우 오디션에서 1천200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발탁돼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그해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청룡영화제 인기 여우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작품 ‘안개’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는 1960∼80년대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60년대에는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된다.
배우 윤정희. 가나문화재단 제공
주요작으로는 ‘장군의 수염'(1968), ‘신궁'(1979), ‘저녁에 우는 새'(1982),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등이 있다. 배우로서 출연한 영화가 한국영상자료원 집계로만 280편에 달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은막 스타 중 한 명이었다.
배우 윤정희(오른쪽)가 1968년 영화 ‘파란 이별의 글씨’에서 배우 신성일(2018년 작고)과 함께 연기하고 있다. 2023.1.20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수상 이력도 그만큼 화려하다. 1960∼70년대 대종상·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에서 연기상, 인기 여우상 등을 20여 차례나 받았다.
‘만무방’을 끝으로 스크린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그는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로 복귀했으나 이 작품은 배우로서 마지막 영화가 됐다.
영화 ‘시’에서 미자 역할을 했던 윤씨는 2011년 LA비평가협회와 시네마닐라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0년 4월 14일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시'(감독 이창동)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윤정희 모습. 연합뉴스
그는 1973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 제3대학에서 영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2011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다.
고인은 각종 영화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해 몬트리올영화제 심사위원(1995), 제12회 뭄바이영화제 심사위원(2010), 제17회 디나르영화제 심사위원·청룡영화상 심사위원장(2006) 등을 지냈다.
배우자는 유명 피아니스트인 백건우(77) 씨다. 백씨와는 1976년 결혼식을 올렸다. 자녀로는 진희(46) 씨가 있다.
“윤정희, 소녀같고 우아했던 배우”…영화계 추모 물결
1960∼80년대 ‘은막의 스타’로 불렸던 영화배우 윤정희의 별세에 영화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모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20일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다 타계하셨는데 너무 안타깝다”면서 “회복되리라고 믿었는데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고 애도했다.
그는 “윤정희 배우는 한국영화사에서 1970∼80년대를 관통하면서 영화계를 대표하는 명배우였다. 아마 우리 영화계 역사에도 그렇게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2010년 5월 26일 윤정희가 주연한 영화 ‘시’가 제63회 칸영화제에 각본상을 받은 뒤 서울에서 열린 공식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고인은 10여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왔다. 투병 초기에는 한국으로 발걸음을 종종 했으나 병세가 깊어진 뒤로는 줄곧 프랑스에 머물러 왔다.
김 전 위원장은 “제가 영화진흥공사 사장할 때부터 자주 만났었고, 영화진흥공사에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시나리오 300편을 기증하기도 했다”면서 “(생전) 와인을 좋아하셔서 같이 와인도 나누고 했다”고 추억을 되돌아봤다.
고인과 많은 작품을 했던 고(故) 신상옥 감독의 아들 신정균 감독도 “예쁜 여배우로 보이기 보다는 연기자 윤정희로 보이길 원하셨던 분으로 카메라 앞에서 굉장히 적극적이어서 감독님들이 좋아했던 분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윤정희 씨와 남편분이신 백건우 씨를 연결해준 게 저희 아버지”라며 “아버지가 예뻐했던 사람이 바로 윤정희 여사님이었다”고 떠올렸다.
2010년 11월 26일 윤정희-백건우 부부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3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연합뉴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1990년 ‘한샘’의 모델이셨고, 그 광고의 조감독으로 선생님을 뵈었다”며 “이창독 감독님의 ‘시’ 시사회장에서 만나 그 인연을 말씀드리니 ‘꼭 작품같이 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지만”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원 대표는 “그저 소녀 같으시고 언제나 우아하셨던 윤정희 데레사님, 하늘에선 평안하시길”이라며 영면을 바랐다. 연합뉴스.
영화 ‘시'(감독 이창동)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윤정희 모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