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나 해외에 오래 거주하다 보면 명절에 대한 감각이 바뀐다. 시간이 흐를 수록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더 피부로 느껴지고, 설날과 추석은 다소 무감각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 설날이 올해는 부쩍 매스컴을 많이 탔다. 영문표기를 둘러싼 시비 때문이다. ‘Chinese New Year(중국설)’냐, 아니면 ‘Lunar New Year(음력설)’냐? 논쟁의 중심에 중국과 한국이 있다.
예전부터 논쟁은 있어왔지만 최근 도화선인 된 것은 영국박물관의 ‘Celebrating Seollal(설맞이)’ 행사였다. 박물관측이 온라인에서 ‘Korean Lunar New Year'(한국 음력설)이라고 부연한 것을 두고 중국 누리꾼들이 발끈, 공격에 나선 것이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한국이 중국 문화를 훔치는 걸 명성 높은 박물관이 돕고 있다”는 등 비난의 댓글이 쏟아졌다. ‘중화사상’에서 발로한 확증편향성 탓일까?
예로부터 인류는 동서를 막론하고 해(年)의 한 간지가 끝나고 새 간지가 시작되는 날을 기념했다. 그렇지만 그 유래와 풍습은 각 민족마다 다르다.
중국 음력설인 춘절(春節)의 기원은 2000여년전 순(舜)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자, 신하들과 함께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는 게 유력한 정설이다.
반면, 한국은 서기 488년 신라시대 설을 쇠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부여가 음력 12월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볼 때, 이미 이 때부터 설날의 풍습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음력설을 기념하는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도 나름대로 고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도 음력설을 아시아 전체의 명절로 보는 시각이 점차 늘어나는 분위기다. 이에 따라 ‘Chinese New Year’ 보다는 Lunar New Year라는 호칭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음력설이라 하면 한국을 떠올리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실례로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음력설의 새로운 경향’이라는 특집에서 설날에 지인들과 파티를 하면서 김치를 만드는 한국계 젊은이들의 사진을 머리기사로 올리기도 했다. NYT는 이 기사에서 베트남계 미국인들의 사례도 소개하는 등 음력설이 아시아의 문화라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미주지역 한인들의 설 문화 소개에 상당한 비중을 뒀다.
이 같은 흐름은 K-팝과 영화, 드라마 등 한류(韓流)라는 대중문화 덕에 힘입은 바 크다. 여기에 더해 한인사회의 꾸준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음력설이 중국만의 문화라는 오해가 쉽게 해소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대중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한인사회의 영향력 확대로 주류사회에서 설 문화를 인식하고, 음력설을 공식 기념일로 지정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미국에서는 음력설을 공식 기념일로 지정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미국 내 아시아계가 많이 거주하는 캘리포니아의 경우 제일 먼저 ‘설날’을 주(州) 공휴일로 공식 지정했다.
올들어 메릴랜드주 하원이 아시아·태평양계 음력설을 선포했으며, 글렌 영킨 버지니아 주지사도 이를 현지 주민들과 함께 기념하고 공식 인정했다. 조지아 하원도 지난달 말 홍수정 의원 주도로 음력설 선포식을 가졌다.
앞으로 음력설을 공식 기념일로 선포하는 주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계를 비롯한 아시아계 정치인들과 뜻있는 한인 지도층의 활약이 있음은 물론이다. 연방 차원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는 확산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문화공정(?) 의도와는 달리 설날은 Chinese New Year가 아니라 모든 아시아계의 Lunar New Year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