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피어스-스와니 크릭 파크. 두 공원 이어주는 숲길, 하천길
아이비 크릭 보드워크 걸으며 습지 물새 찾아보는 것도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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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벽두부터 한국에서 크게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하나를 감동깊게 봤다. 경남 MBC가 제작한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다. 주인공은 지난해 문 닫은 진주 남성당 한약방 김장하 선생이다.
중졸 학력의 그는 19세 때 한약업사 자격을 얻고 1963년부터 한약방을 운영했다. 싸고 효험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선생은 그렇게 번 돈을 20대 때부터 가난한 학생들을 찾아 장학금을 주었다. 그 수가 1000명을 웃돌았다. “가난 때문에 나는 배우지 못했지만 내 후배들이 그 억울함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라는 게 선생의 마음이었다.
김장하 선생의 걷는 뒷모습으로 꾸민 ‘줬으면 그만이지’ 책 표지.
지역의 문화예술, 환경, 노동, 여성 단체 등에도 아무 조건 없이 후원했다. 1984년에는 전 재산을 바쳐 고등학교를 세우고 명문고로 키웠다. 7년 뒤, 학교는 개인의 것일 수 없다며 나라에 헌납했다. 당시 가치로도 100억 원이 넘는 자산 규모였다.
선생은 병든 사람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어떻게 나 좋은데 쓸 수 있겠느냐는 게 평생 신념이었다.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사람이 못 됐다며 뒤늦게 찾아와 고개 숙인 사람에겐 “세상은 평범한 사람이 지탱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격려했다.
도움받은 사람은 도처에 널렸는데 베푼 사람은 도무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도 특별했다. 언론 인터뷰를 한사코 꺼렸기에 이번 다큐도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증언들로 만들어졌다.
선생은 평생을 걸어 다녔다. 집과 직장(한약방)은 당연히 걸었고, 조금 멀리 갈 때는 자전거나 버스를 탔다. 다큐엔 중간중간 선생의 걷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세월의 무게에 꾸부정해진 어깨, 노인 특유의 종종걸음이지만 세상 어떤 사람보다 당당하고 뭉클한 걸음이었다.
스와니 크릭 공원 내 그린웨이 표지판.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도 죽기 직전까지 걸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똑같은 시간 산책 나서는 칸트를 보며 그의 고향 사람들이 시간을 가늠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50cm의 작은 키에 병약한 몸을 타고났지만 평생을 규칙적으로 걸은 덕분에 칸트는 80세까지 살았다. 유럽인의 평균 수명이 40세가 채 못 될 때였다.
칸트의 위대한 철학적 성취는 걷기를 통해 사유하고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교육자 장자크 루소(1712~1778)를 존경했다.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는 이곳 스와니 크릭 건너편에서 스와니 크릭 그린웨이와 연결된다.
칸트는 딱 두 번 산책 시간을 어겼는데 한 번은 프랑스 혁명 기사를 읽을 때였고, 또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을 때였다고 한다.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일 때 내 머리도 움직인다”고 했다. 칸트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고 평생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김장하 선생과 칸트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가 사는 동네를 평생 열심히 걸었다는 것이다. 주변에 멋진 산책로가 있었다거나 걷기 좋은 공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걷기라는 가장 원초적인 신체활동을 통해 건강을 지키고, 생각을 모으고, 마음을 다스렸다는 점은 깊이 곱씹어볼 만하다.
벤치에 앉아 쉬는 젊은이들 모습. 습지 전망대와 어우러져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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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는 오히려 자주 이용하지 못해 미안할 정도로 걷기 좋은 산책로나 공원이 많다. 한인들 많이 사는 둘루스와 스와니도 그렇다. 집만 나서면 한 두 시간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예쁜 동네 공원이 있다. 북쪽으로 조금만 차를 몰면 서너 시간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도 즐비하다.
둘루스에 맥 대니얼 팜 공원이 있다면 스와니엔 조지 피어스 공원(George Pierce Park)이 있다. 모두 귀넷카운티 관할 공원이다.
스와니 북쪽에 있는 조지 피어스 공원 입구.
조지 피어스 공원은 304에이커 넓이에 어린이 놀이터, 축구장, 농구장, 야구장 등 생활 스포츠 시설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스와니 크릭 공원(Suwanee Creek Park)도 주민들의 훌륭한 레저 공간이다. 걷기 좋은 트레일도 있고 디스크 골프장 시설도 빼어나다.
스와니 크릭 공원 입구( 겨울, 여름)
두 공원은 스와니 크릭 물줄기를 따라 뻗어있는 오솔길로 연결돼 있다. 그린웨이(Greenway)라는 트레일이다.
북쪽 조지 피어스 공원 쪽에선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 남쪽 스와니 크릭 공원 쪽에선 스와니 크릭 그린웨이로 불린다. 두 구간을 합치면 왕복 10마일, 메트로 애틀랜타 지역 최고의 산책 코스 코스로 꼽힌다.
그린웨이는 거의 경사가 없는 평탄한 포장 산책로다.
그린웨이란 통상 도시 주변 미개발 지역이나 버려진 땅을 재개발해 만든 산책로를 말한다. 스와니에만 있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명사라는 뜻이다.
대개 도시 인근 폐기된 철로나 하천 주변, 옛날 공장 지대를 활용해 조성한다. 도시 주변 자연 생태계 보호 보호라는 목적도 있다. 주로 경사가 별로 없는 평지인데다 포장도 잘 되어 있어 유모차나 휠체어가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그린웨이의 특징이다.
그린웨이는 평탄한 포장 산책로여서 걷거나 달리기는 자전거 타기를 모두 즐길 수 있다.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는 귀넷카운티가 조성한 최초의 그린웨이로 2008년에 개통됐다. 트레일 헤드는 조지 피어스 공원 안 북쪽 끝에 있다. 길이는 왕복 2.5마일로 1시간 정도 느긋하게 걷기에 좋다.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 이정표 앞에 선 필자.
현재 북쪽으로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인데 완공 후엔 뷰포드 몰 오브 조지아(Mall of Georgia)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가 몰 오브 조지아까지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는 스와니크릭 하천과 만나는 곳에서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스와니 크릭 그린웨이로 연결된다.
스와니 크릭 그린웨이는 스와니 크릭 공원에서 시작해 맥기니스 페리 로드를 지나고 마틴 팜 공원(Martin Farm Park)을 거쳐 로렌스빌-스와니 로드 건너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와 만난다.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는 조지 피어스 공원에서 스와니 크릭 공원까지 이어져 있다.
전체 길이는 편도 3.5마일로 부지런히 걸으면 왕복 2시간 남짓 걸린다. 중간중간 진입로가 있어 원하는 구간, 원하는 시간만큼 편하게 산책할 수도 있다.
로렌스빌-스와니 로드 옆으로 설치된 보드워크를 따라가면 스와니 타운센터와도 연결된다. 주말 아침 한두 시간 그린웨이를 걸은 뒤 타운센트 광장 주변 카페나 식당에서 브런치 시간을 갖는 것도 스와니 주민들의 큰 즐거움이다.
스와니 크릭 그린웨이에서 타운센터로 이어지는 트레일 다리. 다리 아래가 스와니 크릭 하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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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나도 가끔 스와니 지역 그린웨이를 한 두 시간 걷는다. 주로 조지 피어스 공원 안 아이비 크릭 구간을 걷지만 가끔 스와니 크릭 공원에서도 시작한다. 요즘같은 겨울은 자연의 싱그러움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걷는 맛이 있다.
두껍게 쌓인 낙엽, 깡마른 숲의 정적을 깨트리는 다람쥐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인기척에 놀라 겅중겅중 달아나는 사슴 무리들,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올려다보이는 차가운 겨울 하늘, 그 위로 높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는 맹금류의 매서운 눈초리. 모두가 도심 공원 숲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들이다.
스와니 크릭 공원 내 트레일. 그린웨이로 이어진다
특히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는 넓은 습지 사이로 가로 질러 놓인 긴 긴 보드워크가 명물이다. 나무 바닥을 밟을 때의 타박타박 발바닥 감촉도 유쾌하거니와, 주변 물웅덩이 곳곳에서 짝지어 떠다니는 물새들을 보는 것도 즐겁다. 이곳에는 갖가지 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타 커뮤니티 탐조 동호회원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습지를 가로질러 놓인 보드워크. 유모차나 자전거도 쉽게 다닐 수 있다
부지런히 걷다가 습지 전망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물멍’에 잠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머잖아 계절이 바뀌고 좀 더 물이 차오르면 작은 물고기들은 떼 지어 헤엄칠 것이고, 양지바른 물가엔 거북이가 기어 나와 일광욕을 즐길 것이다.
한 무리의 물새떼가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 주변 물웅덩이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또 사방 가득 울어댈 개구리 소리는 또 얼마나 요란할까. 그런 모습들을 상상하며 나 또한 이곳 풍경의 일부가 되어 보는 것, 이것 역시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의 매력이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지탱한다는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처럼,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도 이런 평범한 동네공원이고,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그린웨이 산책길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린웨이의 울창한 여름 숲.
#. 메모 : 아이비 크릭 그린웨이는 조지 피어스 공원(55 Buford Hwy, Suwanee, GA 30024)을 찾아가면 된다. 트레일 헤드(2020 Clean Water Dr, Buford, GA 30519)는 공원 입구에서 1마일 쯤 더 들어가 북쪽 끝에 있다. 스와니 크릭 그린웨이는 스와니크릭 공원(1170 Buford Hwy, Suwanee)에서 시작한다. 뷰포드 하이웨이 교차로 인근 맥기니스 페리 로드(3640 Burnette Road)나 마틴 팜 공원, 스와니 타운센터에서도 그린웨이로 진입할 수 있다. 주차 공간은 모두 넉넉한 편이고 입장료나 주차비는 없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