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귀국했을 때는 한국에 온 것이 좋았고 미국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2년이 되어가는 요즘은 앨라배마와 한국의 생활이 혼재하고 있는 것처럼 앨라배마 생각이 많이 난다.
혹독한 한국의 겨울은 따뜻한 앨라배마의 겨울을 저절로 생각나게 했다. 곧 봄이 올 앨라배마 겨울 풍경이 머릿속을 스치다가 웬 산이 보이나 하면 한국 집 앞의 산이다. 내 안에는 한국과 미국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면서도 집안에 수도나 시설물에 작은 이상이 생기면 미국 타운하우스 오피스에서 일하던 기술자 마ㅇㅇ 생각이 난다. 매월 아파트 소독하러 올 때마다 미국에서 소독하러 오던 마음씨 착한 저ㅇㅇ이 생각난다. 모든 일마다 미국을 떠올리며 이제 한국에 와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이렇게 생활의 모든 면에서 앨라배마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뒤늦은 정체성의 혼란인지 아니면 혹시 심각한 정신의 혼란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아파트에 살다 보니 엘리베이터에서 이웃들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민망해서 먼저 인사를 한지 2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무표정하며 답 인사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역력한 이웃들을 보면 앨라배마의 인사성 밝고 상냥한 미국인들이 떠오른다. 그런 시작은 궁극적으로 앨라배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킨다.
미국을 향한 그리움은 사실 매우 모순된 것이다. 나는 미국 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고 그래서 미국을 떠나더라도 미국 생각은 절대 하지 않게 될 거라고 예언(?)까지 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약인지 변덕인지 슬그머니 생겨난 그리움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래서 그리움이란 단어는 좀 쑥스럽다. 그리움이란 표현 대신 ‘많이 생각난다’는 말을 쓰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다. 미국은 나의 일상 가운데 함께하고 있고 많이 생각이 나니까 말이다.
많이 생각나는 것 하나,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 때때로 보고 싶기도 하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다더니 기억 속의 친근함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한국에 오면 볼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쉽지 않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만남도 서먹해질텐데… 좋은 사람이었음을 가끔 기억하다가 점차 서로 잊게 될 것이다. 할 수 없이, 함께한 시간만은 진실했음을 위로 삼기로 한다. 그런 생각은 슬프다.
많이 생각나는 것 둘, 맑고 깨끗한 공기가 정말 아쉽다. 숨을 오래도록 삼키고 싶던 깨끗한 공기가 가장 많이 생각이 난다. 한국의 혼탁한 공기 때문에 미국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공기처럼 많이 생각나는 것으로는, 내가 살던 집 맞은 편에 있던 크고 아름다운 돌배나무가 보고 싶다. 말없이 꽃을 가득 피워낸 후, 꽃이 지면 녹색의 잎을 무성하게 내던 나무가 보고 싶다. 나무는 나를 모르겠지만.
많이 생각나는 것 셋,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끝없이 넓은 땅이 제일 먼저 나를 압도했다. 앨라배마의 끝없이 펼쳐진 대지, 그 광활함의 매력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한 날은 끝없이 펼쳐진 그 곳의 도로가 생각나고 나는 상상으로 그 길을 달린다. 넓고 끝없는 도로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트이는 것 같다.
고마운 것 하나, 처연하게 빛나던 앨라배마의 ‘달’은 나의 창문을 지키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 밝은 빛이 창 안으로 들어 오면 반가워서 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타국 생활에 참으로 고마운 벗이었다.
한국에 오고 나니 ‘달’이 그때와 다름없이 조용히 나의 창 밖을 지키다가 사라진다. 같은 ‘달’ 일까. 다른 ‘달’일까. 어떻든 상관 없다. 호위무사처럼 나의 창 밖을 지켰던 앨라배마의 ‘달’이 아직도 고맙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부분을 잊으며 살게 된다. 앨라배마의 기억도 잊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함께한 앨라배마를 마음에 품기로 한다. 저절로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앨라배마를 추억할 것이다.
아름다운 목화밭, 슬픈 노예의 이야기가 공존하는 광활한 그 곳, 내게 앨라배마는 거칠고 원시적인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또 모순된 그리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