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드문 호젓한 트레일
여유롭고 평화로워 흐뭇
소풍 삼아 다녀오기 좋아
한국의 강은 넉넉하다. 유역에 기름진 땅을 만들어 인심 좋은 마을을 품는다. 그런 강 마을은 지나는 나그네조차 그냥 보내지 않았다. 오래전 교과서에 실렸던 박목월의 시는 한국인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조지아에도 강이 있다. 하지만 이곳의 강은 이런 한국의 강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조지아 최대 강이라는 채터후치강도 그렇다. 이 강은 평야가 아닌 숲을 헤집으며 흘러간다. 강폭이 좁은 편이어서 물 흐름이 깊고 다급하다. 물빛도 탁해 누렇거나 희뿌옇다. 조지아 토양이 대부분이 붉고 미세한 황토여서 거기서 나온 침전물이 강으로 녹아들어 그렇다.
목가적인 풍경을 만나기도 힘들다. 어쩌다 별장 같은 호화 저택들이 있어 탄성을 자아내게는 하지만 시심(詩心)까지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강을 찾아간다. 콘크리트 중심의 도시 삶에 진력이 나서, 숲과 나무가 있는 원시 자연이 갈급해서일 것이다.
아름드리 나무 기둥엔 기생 식물이 자란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해 당국은 친절하게도 강이 있는 곳에 이런저런 인공 시설물을 만들어 놓았다. 좀 더 편하게, 안전하게, 유익하게 놀다 가라고 휴양지니, 자연센터니 해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채터후치 벤드 주립공원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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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터후치 벤드 주립공원은 I-85 고속도로 인접 도시 뉴난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더 올라간 곳, 코위타(Coweta) 카운티 서쪽 끝에 있다. 애틀랜타에서 그리 멀지 않고, 둘루스 한인타운에서는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벤드(Bend)는 말발굽이나 거위 목처럼 급하게 굽어진 지형을 말한다. 채터후치 벤드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강변 전망대에서 바라본 채터후치강
공원은 강변 5마일에 걸쳐 있다. 전체 면적은 2910에이커로 조지아 주립공원 중에서는 꽤 넓은 편이다. 여느 주립공원처럼 산장(cottage)과 캠프장, RV 사이트 등의 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고, 하이킹과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트레일도 꽤 훌륭하다. 카약이나 카누 등 뱃놀이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강에 배를 띄울 수 있도록 보트 램프도 설치돼 있다.
강변 트레일 입구 주차장 부근. 울창한 송림 아래 바비큐 시설도 있다.
채터후치강의 발원지는 조지아 북쪽 산악지대다. 총 길이는 420마일(약 680km)로 조지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기 전 먼저 조지아 북부 구석구석을 적신 뒤, 앨라배마와 조지아 주 경계선이 되었다가 다시 조지아와 플로리다를 가르고 세미놀 호수(Lake Seminole)로 흘러든다.
조지아 플로리다 경계를 이루는 세미놀 호수에는 조지아 중서부를 적시며 내려온 또 하나의 큰 강, 플린트강(Flint River, 344마일)도 합류한다. 두 강은 호수를 벗어나면서부터 애팔래치콜라강(Apalachicola River)으로 이름을 바꿔 플로리다 연안 멕시코만까지 흘러간다.
강을 따라 뻗어있는 리버사이드 트레일.
채터후치라는 이름은 조지아 북부 지역 원주민 말에서 유래했다. 강 상류 일대에 다양한 얼룩무늬 화강암이 많았기 때문인데, 바위나 돌멩이를 뜻하는 차토(chato)와 얼룩이 있다는 뜻의 후치(Huchi)가 합쳐진 말이 채터후치다.
채터후치강은 한반도에서 가장 긴 압록강과 거의 비슷하지만 미국 전체로는 40위권 밖이다. 미국에서 가장 긴 강은 미시시피강 지류인 미주리강(2341마일)이다. 미시피강(2340마일)은 두 번째로 길다. 세 번째는 알래스카에 있는 유콘강(1979마일)이다. 멕시코와의 국경을 이루는 리오그란데강(1759마일)이 네 번째, 유명한 콜로라도강(1450마일, 2330Km)이 다섯 번째로 긴 강이다.
강변 트레일에서 바라본 조지아의 젖줄 채터후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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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봄기운이 이른 2월 초 주말 아침, 채터후치 벤드 주립공원을 찾아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지아 주립공원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도 결정적으로 볼만한 것,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그래도 가볍게 걷기 좋은 트레일이 있어 소풍 삼아 한 번 다녀오기엔 나쁘진 않은 곳이다.
도심을 벗어나 찾아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지만 한적할 정도로 오가는 차가 없었다. 일을 찾아, 문명의 편리함을 좇아 도시로 몰려드는 이촌향도(離村向都)는 세계적 현상이다. 조지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는 동안 드문드문 지나친 마을이나 집들도 쇠락의 기미가 역력했다.
산길을 달리다 무더기로 나무를 베어내고 있는 벌목 현장도 만났다. 이른 아침인데도 기중기처럼 생긴 커다란 차량이 부지런히 나무를 뽑아내고 있었고, 주변엔 갓 베어낸 다듬은 통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이 줄지어 있었다. 이런 외진 곳에 새로 집터나 공장 부지를 조성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나무를 베어내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목재 생산을 위한 벌목 현장이었다.
조지아 벌목현장. 갓 잘라낸 목재가 트럭에 가득 실려 있다.
조지아는 오리건주와 함께 미국 내 목재 생산량 1~2위를 다툰다고 한다. 2021년 조지아대학(UGA) 농업생산연감에 따르면 2019년 조지아의 목재 생산액은 6억 7900만 달러로 양계산업(40억달러)과 목화 재배(9억 8300만 달러)에 이어 세 번째였다. 그러니까 이런 벌목은 자연산 나무를 아무렇게나 베어 내는 게 아니라 계획적으로 심은 나무를 곡식 수확하듯 관리하고 생산하는 것이었다.
조지아 외곽을 다녀보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끝도 없이 펼쳐진 숲을 자주 만나는데 그게 다 1980~90년대 조지아 주 정부의 식목 정책에 따라 집중적으로 심은 나무들이라는 것이다.
채터후치 벤드 주립공원 입구.
이런저런 풍경을 살펴가며 마침내 도착한 공원이었지만 입구부터 한산했다. 먼저 방문자 센터부터 들렀다. 외관은 번듯했고 실내도 깔끔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복 입은 직원 아가씨가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공원 지도를 하나 받아들고, 기념으로 냉장고에 붙일 자석도 하나 샀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주립공원 1년 입장권(Annual Pass) 기한이 2월로 끝나는데 내년 3월까지 쓸 수 있는 새 걸로 구입 가능한지 물었다. 대답은 노(No), 3월에 사야 그때부터 1년이 가능하다고 했다.
48개 조지아 주립공원을 1년 간 무제한 입장할 수 있는 애뉴얼 패스(50불).
하지만 금세 말을 바꿔 그렇게 해주겠다고 해서 얼른 달라고 했더니, 62세 이상이면 반값 할인도 된다며 나이를 물었다. 아직은 아니라며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자 아쉬운 듯 “이제 거의 다 됐네요(You are almost done)”라며 하하하 웃었다. 그런 친절과 웃음이 고맙고 유쾌해 함께 기념 촬영을 청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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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킹 출발점인 트레일 헤드는 방문자 센터에서 강 쪽으로 2마일쯤 더 들어간 강변에 있었다. 나는 강변을 따라 이어진 리버사이드 트레일(Riverside Trail)을 걸었다. 강변이어서 운치가 있고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여서 그다지 힘들 것 없는 코스였다. 전체 길이는 왕복 10마일, 3시간쯤 걸리지만 가다가 힘들면 쉬고, 아무 데서나 돌아와도 되기 때문에 아이나 노인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
길이 고르고 평탄해 남녀노소는 물론 애완견까지 산책하기 좋다.
조지아 트레일이 어디나 그렇듯 이곳 역시 훤칠한 나무가 빼곡했다. 아직은 겨울 끝이라 숲의 속살이 다 드러나 보였지만 머지않아 잎이 돋고 금세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해질 숲을 상상하며 걷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걷는 게 단조롭고 지루해질 만하면 뭔가 하나씩 나타나는 것도 좋았다.
리버사이드 트레일에 있는 채터후치강 전망대. 주차장에서 1마일 지점이다.
우선 트레일 헤드에서 1마일쯤 가면 나오는 전망대가 그렇다. 공원의 랜드마크가 된 이곳은 채터후치강을 무척 사랑했던 누군가의 기부로 만든 것이라는데, 올라가 쉴 수도 있고 사진을 찍어도 좋을 곳이었다.
거기서 0.5마일 정도 더 가면 나오는 늪지대도 신기했다. 이런 숲에 웬 연못인가 싶고, 작은 나무다리 아래까지 찰랑찰랑 물이 차올라 있는 풍경도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트레일 중간에 만난 늪지대. 다리 아래까지 물이 차올라 있다.
트레일 중간중간엔 채터후치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도 몇 개가 있었다. 모두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지만 한 곳은 물이 불어 길이 끊어져 있었다. 뛰어 건너기는 좀 멀고, 발을 담그고 건너기도 불편한 상황, 주변을 살피니 마침 커다란 나무 둥치가 보이기에 끙끙대며 끌어다 물 양편으로 걸쳐 놓았더니 외나무다리가 되었다. 엉성하긴 했지만 건너는 데는 이상이 없을 것 같았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도 이 다리를 건너겠지 싶어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트레일 중간 중간 개울이 있고 이런 다리도 있다.
작은 개울이 생겨 끊어진 트레일에 나무 둥치를 놓아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은 강과 멀어지며 언덕으로 이어졌다. 바로 건너편에 피크닉 테이블도 보였지만 거기까지 가는데는 언덕을 돌아 1마일은 더 걸어야 했다. 20분 정도를 더 걸어 아까 보았던 피크닉 테이블까지 와서 배낭을 벗었다. 강물이 가파르게 굽이도는 벤드(bend)가 바로 이곳 부근이었다. 한참을 쉬면서 물가에도 가 보고, 강물에 취해 흥얼흥얼 노래도 읊조렸다.
리버사이드 트레일 약 3마일 지점에 있는 피크닉 테이블. 강물이 가장 급하게 돌아가는 곳이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맘이 설레인다
〈김민기 ‘강변에서’〉
꼬마야, 꽃신 신고 강가에나 나가 보렴
오늘 밤엔 민들레 달빛 춤출 텐데
너는 들리니 바람에 묻어오는 고향 빛 노랫소리
그건 아마도 불빛처럼 예쁜 마음일 거야
〈김창완 ‘꼬마야’〉
가는 길에 만난 버려진 집.
30~40년 전 열심히 부르고 들었던 노래들이다. 젊은 가수가 파릇파릇한 마음으로 썼을 노랫말이 새로웠다. 이런 노래에 반응하던 그 시절의 나 역시 청춘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마음도 녹이 슬어 이젠 어떤 노래에도 무감각해져 버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곳 채터후치 강가에서 다시 그런 노래라니. 강변을 걷는다는 것은 녹슨 마음을 닦아내고 메말랐던 감성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구나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채터후치 벤드 주립공원 지도. 파란색이 강이다.
# 메모 : 공원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개방한다. 입장료(주차비) 5달러. 주립공원을 1년에 10번 이상 갈 수 있다면 연간 무제한 이용권(50불)을 사는 것이 좋다. 62세 이상은 50% 할인해 준다. 62세 이상 시니어는 공원 내 산장, 유르트, 캠프사이트, 골프장 모두 20% 할인된다. 주소 : 425 Bobwhite Way, Newnan, GA 30263(Coweta County).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