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참혹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사람들에게 눈물과 고통을 안겨준다. 그래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전쟁, 아 끔찍한 전쟁이여!”라고 탄식했나 보다. 15세기 초에 동로마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인이었던 동로마제국은 비록 콘스탄티노플 부근을 겨우 영유하고 있을 정도로 쇠락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만은 난공불락을 자랑할 만큼 견고했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이 기독교의 손아귀에 있는 한 오스만 제국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즉위 3년째에 들어가는 1453년 1월, 술탄은 신하들을 불렀다. 그는 역대 술탄들이 하지 못한 일을 주문했다. 바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 그는 병력을 준비했다. 정규군 8만 명, 비정규군 2만 명, 도합 10만의 병력을 모았다. 그리고 오스만의 전 함대를 불러모았다. 두 달 후인 3월에 어마어마한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닻을 내렸고, 지상병력이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집결했다.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진을 치고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4월 6일, 청동대포가 포문을 열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황제의 지휘 아래 수도 방어에 들어갔다. 비잔틴 측의 병력은 황제 휘하의 병력 5천 명,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지원한 외국인 2천 명 등을 합쳐 7천 명에 악간 모자랐다. 7천의 병력이 10만의 대군을 맞게 된 것이다. 성벽만 무너지지 않으면, 식량만 충분하다면 버틸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성은 4차 십자군에 의해 두 번 함락되기 앞서 1000년 동안 숱한 적들을 방어해 낸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오스만이 끌고 온 청동대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첫날 공격에 육지쪽 카라시우스문 근처 성벽이 허물어졌다. 비잔틴군은 곧바로 무너진 곳을 보수했다.
해상 방어는 금각만 입구에는 쇠사슬이 처져 있는데다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베네치아 해군이 버티고 있어 오스만군은 성채 남쪽만 포위하고 있었다. 몇 척 되지 않았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 해군은 오스만 해군을 오도가도 못하게 했다. 만만할 것 같았던 콘스탄티노플은 한 줌도 되지 않는 방어군에 의해 굳건히 유지되었다. 보름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술탄은 대담한 계획을 밀어붙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금각만으로 밀어 넣어 성을 포위한다는 계획이었다. 술탄은 해협에서 금각만에 이르는 도로를 닦았다. 도로 위에 철길을 놓고 거대한 받침대를 제작해 쇠바퀴를 달았다. 그 위에 무거운 선박을 실었다. 수십 마리의 황소들이 이끄는 77척의 선박이 높이 70미터의 언덕을 넘어 금각만으로 내려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금새 금각만이 육지에서 끌려온 오스만의 선박에 의해 장악되었다.
농성 40일이 지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 당시 2000여 명의 용병을 지휘한 사람은 제노바 출신의 유스티니아니라는 용병대장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이 가시화되었을 때부터 그는 황제와 더불어 전군을 시찰하고, 훈련을 감독했다. 하지만 치열한 공방전 중에 부상을 입은 그는 도망치려고 했다. 황제가 이를 목격하고 소리쳤다. “경의 상처는 경미하다. 위험이 급박하여 경이 필요한 마당에 어디로 물러간단 말이냐?” 유스티니아니는 벌벌 떨면서 말했다. “소신은 하나님께서 투르크 인들에게 열어주신 바로 그 길로 물러가고자 합니다.”
5월 28일, 패배를 예감한 황제와 시민들은 함께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5월 29일 자정, 이슬람 군은 수륙 양면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오스만 포병은 전선에서, 갤리선에서, 교량 위에서 사방으로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무적의 예니체리 부대가 밀어부쳤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병사들과 함께 오스만 군을 향해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황제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내 머리를 베어줄 기독교인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의 갑옷을 벗어 던진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는 이윽고 혼전 속에서 어느 이름 모를 병사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시체 더미 속에 묻혔다. 그가 죽자 수비군의 저항은 끝났다. 콘스탄티노플은 약탈당했고 그 와중에 약 4,000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렇게 농성 53일 만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동로마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메흐메드 2세는 성 소피아 사원에서 나와 황량한 궁전으로 향했다. 그는 마냥 승리의 환희에 취해 있을 수가 없었다. 처참하게 무너진 궁전을 바라보며 인간의 위대함은 덧없는 것이라는 우울한 상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페르시아의 시에 나오는 시의 한 귀절을 읊었다. “거미가 황궁에 집을 지었도다. 부엉이가 아프라시압(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왕)의 탑에서 야경의 노래를 불렀도다.” 동로마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문명의 승리를 기념해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다. 메흐메드의 명령에 따라 동방교회의 본산인 성 소피아 사원은 회교 사원으로 개조된다. 그리고 1923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을 계승한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로 옮길 때까지 이스탄불은 470년간 가장 위대한 이슬람 세력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한때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최후는 흥망성쇠 생로병사의 순환 고리를 갖는 인간사의 종말과 비유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옛 로마의 광휘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흥망성쇠를 거스를 수 없던, 외롭고 처절하게 결사항전하는 신민들의 절망적인 모습에선 비애와 연민을 느끼게 된다. 오스만투르크의 강력한 군사력이 동로마제국이 몰락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극심한 내부분열과 지도자들의 무능. 안보불감증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 5세기 비잔틴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이 완전히 들어맞을 순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흐르는 정신적 심리적 차원의 교훈은 똑같다.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