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잠 길에 요란하게 다녀가는 빗소리가 꿈을 꾸는 듯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젖은 잎들을 보니 꿈은 아니었다. 누런 잔디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초록 잎들이 봄이 다가왔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철새들이 이사를 가는건지, 오는건지 모르겠지만 옷 벗은 하얀 나무위에 가득한 잎들이 되어 앉아 있었다. 짹짹거리는 요란한 소리는 화음을 맞추기 전에 발성 연습을 하는 합창단원들 같다. 작업실에 앉아 큰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머그잔 가득한 커피향이 나를 취하게 했다.
책상위에 쌓여 있는 책들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그곳에 숨어있는 클림트의 화집을 찾아 들었다. 책의 앞, 뒤 겉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과 ‘키스’그림을 한 참 보았다. 많은 사람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화려한 그림이다. 클림트의 대표작품 이다. 그림에 관심이 있든 없든 시선을 사로잡는 마력 같은 힘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무채색을 좋아했고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느낌을 좋아했다. 나이 들면서 취향도 변하더니 이제는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고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것에 눈길이 점점 가고 있다.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예전에 지나쳤던 것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폴란드 사는 친구의 초대로 여행을 갔던 기억이 났다. 친구집에 머물며 어느 날은 기차를 탔고, 버스를 타기도, 직접 운전해서 달리기도 했다. 어슬렁 느린 걸음으로 다니며 햇살을 느끼고, 공기도 느끼고, 하늘빛에 물들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종일 집안에 앉아 익숙한 듯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풍경들과 눈 맞추며 수다를 떨기도 했다. 일정을 정하지 않고 갔던 여행이라 자유롭고 편했다.
유럽은 여러 나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보니 자동차 여행이 즐거웠다. ‘여기부터는 독일이야’ ‘여기는 체코’ ‘우리가 슬로바키아를 지나고 있네’ 마치 미국을 달리며 각 주를 지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순간의 잔상은 보관된 사진들처럼 한 컷 한 컷 떠오른다. 그리고 어디를 가나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들이 많아서 좋았다. 기억을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들을 보았다.
오스트리아 갔을 때였다. 클림트 그림 좋아하느냐고 물었던 친구는 그의 작품 세계로 나를 데려다줬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들어선 미술관에는 북적이는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확인시켜 주는듯 했다. 사람들 틈에 가려진 그림들을 온전히 보고싶어 이리저리 고개를 내밀던 생각이 났다. 유난히 사람이 몰렸던 키스 작품 앞에서는 짧은 시간과 관람객에 밀려서 마음껏 음미하지는 못했지만 울림이 남아있다. 오밀조밀 만들어진 친구와의 추억들이 그림 속의 사각형과 원형의 패턴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했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 친구가 떠올라서 행복해진다.
나는 여행이나 미술관 갈 때는 미리 정보를 찾아서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넘치는 정보들이 나의 느낌과 감정들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습득한 정보에 의해서 내가 아닌 누군가의 관점으로 보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싫기도 하다. 특히 모르는 작가들의 낯선 작품을 보러 갈 때면 맘 편하게 간다. 비평가들의 글을 읽고 가면 작품 감상이 아니라 분석하고 확인하는 것 같아 재미가 없어진다. 다녀와서 궁금증이 생기고 자료를 찾아본 뒤에 호기심이 생겼을 때는 다시 가서 작품들을 감상한다. 그 후에 더해진 깊이로 내게 다가올 때는 가끔 만나는 감동이지만 보물을 찾은 듯 기쁘다.
‘키스’ 작품은 유독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과 강한 끌림으로 눈길을 잡았다. 사랑에 대한 환상인지, 아니면 숱하게 뿌리고 간 작가의 욕망의 덩어리에 대한 관람객의 호기심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이 작품은 볼수록 양파처럼 겹겹이 숨어있는 것들이 많다는 느낌이다. 거칠지 않은 깊은 애정이, 부드럽고 강한 전율이, 불안한 벼랑 끝에서도 노래하는 꽃들이 있어서 사랑스럽다. 황금빛 공기가 감싸 안고 있는 공간은 비 현실적인 느낌이지만 선명한 두 사람의 모습은 묘한 감정의 망토 속으로 나를 스며들게 한다. 그 망토 속에 친구와의 시간들이 떠올라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