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자랑스러운 강대국이지만, 한편으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노예제이다. 노예제의 상처는 오늘날 흑백 빈부격차와 흑백 인종갈등, 그리고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 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행한 노예제의 악령을 끊기 위한 흥미로운 실험이 지금 캘리포니아주에서 시작되고 있다. 지난 2021년부터 결성된 캘리포니아 배상금 태스크(California’s Reparations Task Force)가 바로 그것이다. 2021년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통과시킨 법안(AB3121)로 탄생한 이 위원회의 임무는 다름이 아니라, 흑인 노예의 후손들에게 돈으로 보상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흑인 주택 차별, 흑인 집단 감금, 흑인들의 재산 불법 강탈, 흑인 비즈니스 차별, 흑인을 위한 보건 지원 부족 등에 대해 일정한 배상금을 지불하자는 것이다. 무조건 흑인이라고 배상금을 주는 것이 아니며, 19세기 말 이전에 캘리포니아주에 살고 있는 흑인 자유인 또는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의 후손에게만 배상금이 지급된다. 현재 9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적정한 배상 규모를 논의하고 있으며, 최종 보고서는 오는 7월 1일 공개될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은 “흑인 후손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했는데 돈을 준다고?”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배상금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2021년 시카고 북구 일리노이주 에반스톤 시는 인종차별의 보상금으로 흑인 1명당 2만5천달러의 배상금 지급을 결정한 바 있다.
그런가하면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시가 조직한 아프리카계미국인 배상자문위원회는 최근 흑인 주면 1명당 500만달러의 인종차별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권고했다. 샌프란시스코 시가 1960년 흑인 거주지에서 흑인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고급 주택가로 개발한 것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권고사항이다.
캘리포니아주 배상금 태스크포스 위원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나름 일리가 있다. 위원중 한명인 일본계 돈 타마키(Don Tamaki) 변호사는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강제수용된 일본계 미국인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한 적이 있다”며 “일본계 미국인도 4년동안 고통받은 것에 배상받았는데, 400년을 국가적 차원에서 차별당한 흑인들이 배상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246년간의 노예생활, 9년간의 짐 크로우 차별정책, 그리고 수십년간의 인종분리 정책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며 “현재 캘리포니아주 흑인들의 평균수명, 출산율, 가구소득은 타인종에 비해 훨씬 낮은 것이 현실이며 그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 법안을 통과시킨 레지 존스-소여(Reggie Jones-Sawyer) 주하원의원은 “예를 들어 LA다운타운은 원래 흑인들의 소유였으나 정부 차원에서 흑인들을 몰아내고 재개발한 결과 땅값이 엄청나게 뛰었다”며 “금전적 배상만으로 흑인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생활 수준은 개선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독자들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행한 역사는 돈으로 배상할 수 있는가’ 그러나 법적으로 볼 때는 결코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법만 해도 불법행위 민사소송에서 잘못한 사람에게 육체적 처벌이나 고문을 금지하며, 그 대신 피해자에게 금전적으로 배상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적 차원의 잘못을 금전적으로 배상하는 것은 타당하다.
‘100년전에 잘못한 것까지 사과하고 배상해야 하나”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계 미국인들도 1941년 집단 수용소에 감금된데 대해, 47년 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공식 사과를 받고 1인당 2만달러의 보상금을 받았다. 같은 논리로 100여년 전에 한해 학대받고 차별받은 흑인들의 후손에게 금전적으로 보상하는 것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사실 이런 식의 논쟁은 우리 한인들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바로 일제시대 식민통치에 대한 사과와 보상 문제다. 2차대전 후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식민지 피해 보상금으로 22억달러를 요구한 적이 있으며,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정의 결과 일본에게 ‘보상금’조로 10년간 연 3000만달러를 받았다. 일본은 일제시대 모든 문제가 이 돈으로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의 사과 여부를 둘러싸고 한일양국 갈등은 여전하다.
불행한 역사는 돈으로 배상할 수 있는가? 정답은 없다. 캘리포니아주의 흑인 배상금 실험이 미국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아직은 알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진정한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반성과 사과가 먼저라는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