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지미 카터 기념관
은퇴 후 더 빛났던 삶 기록
야외 정원도 산책하기 좋아
인근엔 유명한 ‘프리덤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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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전 대통령(재임 1977~1981)은 조지아의 자부심이다. 조지아 출신의 유일한 대통령이어서만이 아니다. 은퇴 후의 삶, 노년의 일상도 얼마나 멋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고의 미국인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지아 중부 시골 플레인스의 땅콩 농장 농부 출신으로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백악관에 입성했다. 하지만 재임 시절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2차 오일쇼크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미국인 53명이 억류된 이란 인질 사건이 임기 내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기치로 내건 인권 외교도 현실에 벽 앞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결국 다음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밀려 현역 대통령으로선 이례적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지미 카터 출생증명서. 1924년 10월 1일 오전 7시에 태어났다는 것과,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라는 아기 이름이 씌어져 있다.
그는 진가는 퇴임 후에 나타났다. 다른 퇴임 대통령들 대부분이 선택했던, 회고록을 내고 고액 강연으로 억만장자가 되는 길을 그는 거부했다. 대신 1982년 아내 로잘린 여사와 함께 평화와 인권, 공중 보건 증진을 목표로 한 카터센터를 만들어 자신이 믿고 실천해온 가치를 전파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봉사인 해비타트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카터 부부의 결혼 사진. 두 사람은 1946년 7월 7일 결혼해 지난해 76주년 기념일을 보냈다.
1994년에는 북한 핵위기 해결을 위해 북한 김일성도 만났다. 하지만 2주 만에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그가 주선한 남북정상회담은 결실을 보진 못했다. 그 후에도 그는 지속적인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인권 신장과 낙후 지역의 경제·사회 개발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공로로 2002년엔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토요일 오후 카터 기념관을 찾은 가족들.
분주한 활동 속에서도 그의 일상은 검소했고 한결같았다. 생활의 뿌리 역시 늘 조지아였다. 1981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그가 돌아간 곳도 플레인스의 2베드룸 집이었다. 정치 입문 전 경영했던 땅콩 농장이 가뭄으로 파산하고 유일하게 남은 재산이었다.
그는 고향 플레인스마라나타 침례교회에서 50여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가 퇴임 후 고향에 내려간 바로 그다음 주일부터 다시 그 교회에서 봉사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요즘 플레인스엔 부쩍 방문객이 늘었다고 한다. 지난 2월, 98세 카터 전 대통령이 더 이상의 병원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마지막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다.
카터 센터 경내에 있는 호수. 호수 너머로 애틀랜타 도심 건물이 보인다.
1987년 연방 역사 공원(The Jimmy Carter National Historical Park)로 지정된 플레인스 일대는 나도 한 번 가 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가 보지 못했다. 둘루스에서 3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라 선뜻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지난 3월 첫 토요일, 애틀랜타 다운타운에 있는 지미 카터 대통령 기념관을 찾았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준 조지아의 큰 어른을 그의 생전에 간접접으로나마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조지아 주민의 도리일 것 같아서였다.
카터 센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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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기념관(The Jimmy Carter Library & Museum)은 39대 카터 대통령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이다. 퇴임 후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세운 비영리 단체 ‘카터센터’도 이곳에 있기 때문에 ‘라이브러리 앤드 뮤지엄’ 이라는 긴 이름 대신 편하게 ‘카터센터’로 불리기도 한다.
기념관 입구에 있는 지미 카터 대통령 흉상.
기념관은 1984년 10월 착공돼 2년 뒤인 1986년 10월 1일, 그의 72회 생일에 맞춰 개관했다. 땅은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가지고 있던 조지아 주정부 부지였고, 건축비 2600만 달러는 개인 기부금으로 충당했다. 2009년 1천만 달러를 들여 리모델링도 했다.
카터 뮤지엄 입구.
기념관을 찾으면 우선 둘러봐야 할 곳은 뮤지엄이다. 입장료(어른 12불. 16세 이하 무료. 60세 이상은 10불)를 내고 들어가면 카터 전 대통령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고향 플레인스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 재임 기간, 퇴임 후 활동에 대해 섹션별로 잘 정리돼 있다. 카터 대통령의 평생 동반자이자 사회 활동가였던 퍼스트레이디 로잘린 여사에 관한 기록도 꽤 많다.
카터 뮤지엄 내부. 관람객들이 제법 많다.
카터 뮤지엄에서는 퍼스트레이디 로잘린 여사의 활동도 자세해 소개하고 있다.
나는 1924년 발급된 출생증명서와 해군 제복을 입고 찍은 결혼식 사진, 김일성과 찍은 사진, 노벨평화상 메달, 기념관 기공식 때 사용됐던 삽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모양 그대로 복원해 놓은 타원형의 백악관 집무실(Oval Office)과 재임 시절 세계 각국으로부터의 진귀한 선물도 볼만했다.
1979년 미국을 방문한 중국 등소평이 카터 태통령 부부에게 선물한 고양이 자수 액자.
라이브러리는 일반인을 위한 도서관이라기보다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종합 연구 자료실이다. 연방 문서기록관리청(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대통령 도서관 시스템의 일부로, 4000만 페이지에 이르는 재임 당시 각종 자료와 문서, 서신, 행정부 관련 서류가 보관돼 있으며 200만장의 사진과 2500시간 분량의 영상 자료도 있다고 한다.
뮤지엄 내부엔 백악관 시절 대통령 집무실도 똑같이 만들어 놓았다.
뮤지엄을 둘러본 후 건물 밖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35에이커에 이르는 기념관 경내는 2개의 아담한 호수와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으로 꾸며져 있어 20~30분 산책하기에 딱 좋다. 호수와 산책로, 정원엔 기부자의 이름을 새긴 동판이 곳곳에 있는데 일본인 이름이 많은 것이 특이했다.
카터 기념관 바깥 정원. 20~30분 산책하기 좋다.
기념관 입구의 50개 주 깃발이 세워진 원형 광장 옆에 세워진 일본식 목조 종각도 이채롭다. ‘평화의 종(The Peace Bell)’으로 명명된, 200년이 넘은 일본 종이 걸려있는 곳이다.
지미 카터 뮤지엄 입구에 있는 원형 광장. 50개주 깃발이 걸려있다.
안내문에는 이 종은 1985년, 당시 애틀랜타 일본 총영사와 조지아 일본상공회의소장이 기증했다고 되어 있다. 원래는 1820년 히로시마 인근 쇼간지(正願寺)라는 사찰에서 주조한 종인데, 2차 대전 후 영국으로 유출됐다가 미국 플로리다까지 흘러온 것을 조지아 일본인상공회의소가 구입했다는 부연 설명도 있다.
일본 커뮤니티가 기증한 평화의 종과 종각.
기와 지붕의 자그마한 종각은 2022년 9월 30일에 완공된 비교적 새 구조물이다. 조지아 일본 커뮤니티가 힘을 합쳐 기금을 모으고, 히로시마산 소나무로 쇼간지 절에 있던 원래 종각을 똑같이 복제해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전쟁 장본인들이 버젓이 ‘평화의 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놀라웠다. 어떻게 이런 명소에 자기네들 기념물을 세울 생각을 했으며, 이렇게 성사시켜 카터 기념관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의 이미지를 세탁하고 있다는 게 대단하다 싶어서였다.
1820년 일본 히로시마 근교 사찰에서 주조된 일본 범종. 미일 우호의 상징으로 ‘평화의 종’으로 명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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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센터 인근에는 프리덤파크(Freedom Park)라는 공원이 있다. 애틀랜타 도심 거주자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이 공원은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평생 인권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2명의 미국인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한 명은 당연히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고, 또 한 명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다.
카터 센터 인근에 있는 프리덤 파크.
공원 면적은 약 210에이커로 그다지 큰 편은 아니지만 프리덤 파크 트레일(Freedom Park Trail)이라는 산책로를 통해 도심 다른 여러 지역과 연결돼 있다. 프리덤 파크 트레일은 마틴 루터 킹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다운타운에서 시작하며, 카터센터 부근과 프리덤 공원을 지난다.
애틀랜타는 남북전쟁 당시 치열한 전쟁터로 곳곳에 기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윌리엄 T. 셔면 장군이 애틀랜타를 함락시킨 후 6만2500명의 북군 병사들과 함께 사바나 해안까지 행군해 갔음을 기록한 프리덤 공원의 표지판.
그밖에 캔들러 파크, 인먼 파크, 폰시 하이랜드, 버지니아 하이랜드 등 애틀랜타 올드 타운 일대를 도보로 걸을 수 있도록 이어준다. 유명한 벨트라인 이스트 사이드 트레일(BeltLine Eastside Trail)에서도 바로 연결된다.
카터센터에서 프리덤파크까지의 트레일은 따로 ‘프리덤 파크 라이너 트레일’로 불리는 약 3.8마일 루프로 1시간 남짓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프리덤 파크를 찾은 젊은이들이 따뜻한 봄볕을 즐기고 있다.
# 메모 :
지미 카터 뮤지엄은 일, 월요일은 휴관이며 화~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45분까지만 문을 연다. 마지막 입장은 오후 3시 30분이다. 입장권은 현장에서 구매 가능하지만, 온라인으로 미리 입장시간을 예약하고 가면 편하다. 라이브러리는 화~금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3시30분까지며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웹사이트 www.jimmycarterlibrary.gov
프리덤 파크는 다운타운 모어랜드 애비뉴와 노스 애비뉴 교차로에 있으며 카터센터에서 차로 이동하면 5분 거리다.
▶주소: (대통령 기념관) 441 John Lewis Freedom Pkwy NE, Atlanta, GA 30307 / (프리덤 파크) Moreland Ave NE & North Avenue NE, Atlanta, GA 30308)
카터 대통령 기념관 내부 지도와 입장권, 냉장고용 자석 기념품.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