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금 등 안전자산 ‘쏠림’
실리콘밸리은행(SVB) 붕괴 여파 속에 이틀 만에 또 다른 중소은행인 시그니처은행이 가상화폐 위기 우려 등에 따른 뱅크런(자금 대량 인출 사태)을 맞고 폐쇄됐다.
지난 12일 뉴욕주의 규제당국 금융서비스부(DFS)는 이날 뉴욕주 소재 시그니처은행을 인수하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관재인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시그니처은행의 총자산은 1103억6000만 달러, 총 예금은 885억9000만 달러 규모다.
시그니처은행은 미국 내에서 뉴욕·코네티컷·캘리포니아·네바다·노스캐롤라이나 등에서 영업해온 상업은행으로, 사업 분야는 상업용 부동산과 디지털자산 은행 업무 등이다.
시그니처은행 폐쇄와 관련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금융개혁 법안 ‘도드-프랭크법’을 대표 발의했던 바니 프랭크 전 하원 금융위원장은 SVB 파산 이후 시그니처 은행의 가상화폐 익스포저(위험노출액)에 대한 고객의 우려가 커진 결과 10일 오후에 갑자기 SVB가 공포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연방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SVB 고객들에게 적용된 것과 유사하게 ‘시스템적 위험에 따른 예외’에 따라 시그니처은행 고객들도 예치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시그니처은행의 모든 예금자 자산을 보장하겠다면서도 “SVB 해결안과 마찬가지로 손실을 납세자가 감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중소 지역은행들 불안= 금융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연방정부의 긴급 대책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은행(SVB)의 초고속 붕괴로 촉발된 위기감이 중소 규모 지역은행들을 여전히 내리누르고 있다. 13일 위기설이 도는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주가는 폭락세를 면치 못했다. 팩웨스트 뱅코프, 자이언 뱅코퍼레이션 등의 주식들도 잇따라 거래 중지됐다. 이들 지역 기반의 중소 규모 은행들은 위기가 확산할 경우 SVB와 뉴욕 시그니처 은행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있는 ‘후보’들로 지목돼 왔다.
▶연준, 긴축 고수 놓고 고심= SVB 파산 이후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3일 SVB 파산 사태는 지난 1년간 급격하게 기준금리를 인상한 연준에 경고 신호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40년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이 연준의 지상과제였지만, 연준의 또 다른 존재 이유는 미국의 금융시스템 안정이라는 것이다.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긴축정책을 고수할 경우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단 시장에선 연준이 오는 21일부터 이틀간 열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융 시스템 안정이라는 목표에 더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확산하고 있다. 당초 시장은 연준이 이번 달 FOMC에서 ‘빅스텝'(금리를 한번에 0.5%포인트 인상하는 것)을 밟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러나 SVB 파산 이후엔 0.25%포인트 금리 인상을 의미하는 ‘베이비 스텝’을 유지하면서 숨을 고를 것이라는 예상이 많아졌다.
골드만삭스는 한 걸음 더 나가 연준이 이번 달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긴축 기조는 유지하겠지만, 이번 달에는 일단 숨을 고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투자자들, 안전자산으로 대피=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와 금을 비롯한 안전자산으로 급하게 대피 중이다. 예금자와 금융 시스템 보호를 위한 연방정부의 긴급대책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공포 심리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날 미 국채 금리는 급락세를 연출했다. 채권 금리와 가격은 반대로 움직인다. CNBC 방송에 따르면 2년물 미 국채 금리는 최근 3거래일간 1%포인트 넘게 떨어져 역시 1987년 10월 말 이후 사흘간 최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역시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금 가격도 빠르게 상승 중이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금은 온스당 2.3% 이상 오른 1910달러 대에 거래돼 온스당 1900달러를 재돌파했다.
이런 가운데 월가의 ‘공포 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변동성 지수(VIX)는 이날 장중 28.7을 돌파해 최근 5개월 사이 최고치를 찍었다.
김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