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다. 하지만, 학생 시민들의 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이기도 하다. 그는 한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한편에서는 “친일파들을 중용해 민족정기를 흐렸다”고 그를 비난한다. 그는 애국자였지만, 좌파로부터는 “미국에 붙어 단정(單政) 수립에 앞장선 분단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도 공산화되어 북한처럼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묶였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구한말부터 형성되어 온 문명개화의 꿈을 국가 차원에서 실현한 개화파 지식인 이승만의 공이다.
작가 복거일은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남은 평생 ‘협박’을 하고 산 사람이었다. 그분은 협박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내 말을 반박해 봐라. 못하겠으면 선택하라. 나를 꺾기 위해 큰 비용을 치를 것이냐, 나와 협력할 것인가, 나를 밟고 갈 것인가.’ 그는 미국 사람들에게 잘 통했다. 미국인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계산이 빠른 문화다. 대표적인 예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남과 타협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자 미군 장성들이 흔들렸다. 그는 대만의 경우처럼 제주도로 옮기는 척하며 미국을 협박했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는 질량이 매우 큰 분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외교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첫째, 1950년 10월 1일을 기해 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것이다.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한 이승만은 유엔군이 북진을 망설이자 작전지휘권을 행사해 버린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1989년 펴낸 회고록 〈군과 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했다.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의 위기를 이승만이 아닌 다른 영도자 아래서 맞이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53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3월 28일 북한과 중국측은 부상포로 교환에 동의하는 동시에 다시 포로 교환문제를 다루자고 제의해 왔다. 부상포로 교환협정 조인을 이틀 앞둔 1953년 4월 9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협박성 서한’을 보냈다. 중국군의 한국 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하려 한다면 한국은 압록강까지 북진힐 용의가 있는 나라를 제외한 모든 우방의 철수를 요구하며 미군이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싶으면 공군과 야포, 함포지원만 해주고 후방에 남아도 좋지만, 한국에서 철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은 문맥도 난폭하고 내용도 퍽 과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무마시키려고 곧 답장을 보냈다”고 썼다. 이런 ‘협박’은 가진 것이 없는 약소국 대통령 이승만이 즐겨 써왔던 수법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즈음 방한했던 닉슨 부통령은 이승만의 외교지략과 지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승만은 휴전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실리를 얻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으로서는 큰 손해인 ‘선물’을 한국에 안기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또 다른 돌발행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닉슨 부통령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승만을 만난 닉슨은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는 아이젠하워의 협박 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은 친서를 훑어보고 눈 한번 깜빡하지 않으며 “잘 쓴 편지군요.”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닉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는 법’이다. “한국의 단독행동과 관련된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한미군사동맹은 이승만의 소신과 집념의 산물이다. 미국은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전쟁이 재발하면 16개 참전국 군대가 돌아온다’고 약속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립서비스를 믿고 정전협정에 동의하는 것은 공산화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전격적인 반공 포로 석방으로 보여주며 미국을 압박했다. 한미동맹은 올해로 70주년을 맞는다. 지난 70년의 우리 역사는 이승만의 혜안이 옳고 또 옳았음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군사동맹은 전쟁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실용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산 교훈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이웃 나라의 힘에 굴복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더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거나 이웃 나라보다 강한 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소련 연방 해체를 맞이하여 독립했을 때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나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조건으로 핵무기를 러시아에 양도했더라면 오늘날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핵무기를 뺀 재래식 군사력 기준으로 세계 6위 군사 강국인 대한민국이니 아무 탈 없을 것 같지만, 중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여 있고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 안보를 100% 확보하기 어렵다. 한미군사동맹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요청인 것이다.
지난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8주년 기념행사에서 박민식 보훈처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한 민족이 두 나라로 나뉘어, 북한은 세계 최빈국이 된 것에 반하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국가가 된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친미, 반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