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 송서래(탕웨이)는 중국에서 불치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니를 “원하던 방식으로 보내드렸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후 서래는 어머니의 유골함, 펜타닐 4개를 챙겨 한국으로 들어왔다.
서래의 이 짧은 대사엔 최근 전 세계, 특히 미국을 강타한 ‘펜타닐 위기’에 대한 핵심 키워드가 모두 담겼다. 강력한 진통 효과, 높은 치사율, 밀반입, 그리고 중국이다.
지금 미국이 펜타닐에 중독돼 흐느적거리고 있다. 최근 10년 새 ‘미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뉴욕타임스)가 펜타닐이다. ‘악마의 약’ ‘좀비 마약’이 “어떤 테러리스트보다 강력하게 미국 전역을 초토화하고 있다”(폴리티코 등)는 현지 보도가 나오고 있다.
펜타닐은 ‘뾰족한 연필심을 콕 찍었을 때 살짝 묻은 양’인 2㎎ 정도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약물이다. 헤로인의 50배, 모르핀의 100배 강도의 마약성 진통제로, ‘인류가 찾아낸 가장 강력한 진통제’다. 그리고 서래의 대사에 숨겨진 힌트대로 세계 최대의 펜타닐 생산처는 중국이다. 미국은 지금 펜타닐 지옥으로 자신들을 끌고 들어가는 배후로 중국을 지목한다. 중국이 수면 아래에서 펜타닐로 신(新)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얘기다.
♦펜타닐♦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로 공장에서 화학적 합성을 통해 만들어진 합성 마약이다. 양귀비꽃 추출물로 제조하는 아편·모르핀·헤로인, 코카 잎으로 만든 코카인 등 천연 마약과 달리 공장에서 만들어진 펜타닐은 값이 싸고 강도가 세다. 광활한 지역에 양귀비·코카 등을 재배해야 하는 천연 마약과 달리, 펜타닐은 공장만 있으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펜타닐은 1959년 벨기에 제약회사 얀센이 출시했다. 말기암 환자 등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고통 경감 용도다.
압수된 펜타닐. dea.gov 웹사이트 캡처.
“전 세계 4분의 1 죽일 분량의 펜타닐 미국 유입”
‘국가 수준의 중독’을 일으킨 주범은 바로 펜타닐이다. 지난 10년간 미국 전역에서 펜타닐로 인해 기록적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2021년 약물 과다복용 사망자 10만7000명 중 3분의 2는 펜타닐과 같은 합성 마약 복용으로 인한 것이었다. 퀴노네스는 “펜타닐 중독은 사망뿐 아니라 정신질환, 노숙의 원인도 되고 있다”고도 했다.
미국 내 펜타닐 유입량은 갈수록 늘고 있다. 마약단속국(DEA)에 따르면 지난해 5000만 개 이상의 펜타닐 알약과 1만 파운드(4500㎏) 이상의 펜타닐 분말이 압수됐다. 이는 미국 전체 인구는 물론, 전 세계 인구 4분의 1을 죽일 수 있는 양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 마약 중독과 거래 등에 대한 탐사보도 전문 저널리스트인 샘 퀴노네스는 “현재 미국은 국가 수준의 마약 중독 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펜타닐이 헤로인 등 다른 마약과 구분되는 특징은 높은 치사율이다. 퀴노네스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펜타닐에 장기간으로 중독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펜타닐에 중독되면 모두 단기간에 죽는다”고 경고했다.
펜타닐의 원료는 중국에서 생산된다. 이는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로 대량 유입돼 알약·주사제·패치 등 다양한 형태로 제조된 뒤 미국에서 불법 유통된다.
퀴노네스는 미국 사회를 휘청거리게 만든 펜타닐 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으로 “멕시코와의 다방면 상호 협력”이라고 강조했다. 중간 단계인 멕시코발 유통 라인부터 틀어막는 게 급선무라고 본 것이다.
그는 “미국은 중국·러시아·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쏟는 강력한 관심을 멕시코에 보여준 적이 없다”며 양국 간 “마약 근절을 위한 긴밀한 협력”을 강조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로 공장에서 화학적 합성을 통해 만들어진 합성 마약이다. 양귀비꽃 추출물로 제조하는 아편·모르핀·헤로인, 코카 잎으로 만든 코카인 등 천연 마약과 달리 공장에서 만들어진 펜타닐은 값이 싸고 강도가 세다. 광활한 지역에 양귀비·코카 등을 재배해야 하는 천연 마약과 달리, 펜타닐은 공장만 있으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펜타닐은 1959년 벨기에 제약회사 얀센이 출시했다. 말기암 환자 등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고통 경감 용도다.
? 생각할 대목: 미국인 최대 사망 사유는
지난해 미국 청장년층(18~49세) 사망 원인 1위는 교통사고도, 자살도 아닌 펜타닐 중독이었다. 미국은 지금 펜타닐이 퍼지면서 ‘7분에 1명꼴로 사망자 발생’ ‘25년 만에 기대 수명 최저치(76.4세)로 급감’이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 10년간 꾸준히 늘어온 펜타닐 유통량은 팬데믹 이후 폭증세다. 팬데믹이 촉발한 경제난과 사회적 고립, 의료 서비스의 질 하락 등이 함께 엮이며 어느새 일상에 침투했다. 펜타닐인 줄 모르고 손을 댔다 단번에 중독된 사례가 숱하다.
핼러윈에 어린아이들이 받는 사탕 바구니에 알록달록 색을 입힌 사탕 모양의 펜타닐이 들어있는가 하면 농촌의 주부, 평범한 학교 교사, 월가 직장인까지 부지불식간에 펜타닐을 먹었다가 순식간에 중독자가 되고 있다.
펜타닐을 함유하고 있는 무지개색 옥시코돈. 사진 / 미국 마약단속국 홈페이지 캡처
미국 시민단체 ‘펜타닐에 반대하는 가족’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2015~2021년 6년 동안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20만9491명이 사망했다. 펜타닐 사망자는 2015년 이후 거의 모든 주에서 100% 이상 증가했다. 루이지애나주에서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자는 2015년 이후 24.6배 증가했고,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의 사망률은 20배 이상 증가했다.
대책 마련을 위해 미국은 날록손 등 펜타닐 길항제를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도록 일반약으로 승인하고, 펜타닐 효과를 차단하는 백신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책은 펜타닐이 들어오는 걸 막는 일이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 (왼쪽). 로이터.
“中, 대만 터지면 펜타닐 단속 않는다”
미국은 무슨 근거로 중국을 펜타닐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할까.
① 먼저 중국은 펜타닐 원료의 세계 최대 생산처다.
② 중국 정부는 펜타닐 원료의 불법 유출을 ‘의도적으로’ 방기해 미국 내 펜타닐 유통량을 늘리는 전략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마약단속국(DEA)의 지난해 ‘미국으로 흘러드는 펜타닐’ 보고서는 “현재 중국이 국제우편과 특급 위탁 운영 시스템 등으로 펜타닐을 밀매하는 주요 공급처”라고 명시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는 “중국은 마약 단속을 ‘다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전략적 도구’로 본다”면서 “특히 2020년 이후 마약 퇴치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중국은 매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근 대만·반도체 등 여러 사안에서 미국과 충돌하는 중국이 펜타닐을 ‘전략적 무기’로 삼아 미국을 공격하고 있다는 게 미 당국과 싱크탱크의 판단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 대만·인권 등을 문제삼아 중국에 대한 공세 강도를 높일 때마다 중국 정부는 자국의 펜타닐 원료 제조 공장에 대한 단속 고삐를 느슨하게 하는 방식으로 미국 내 펜타닐 유통을 늘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올해 2월 열렸던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선 미국 내 펜타닐 확산을 놓고 “중국에 책임을 묻겠다”는 의원들의 경고가 이어졌다.
中 ‘미국, 너나 잘하세요’
이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식이다. ‘당신들이 모자라서 벌어진 문제를 왜 우리에게 돌리는가’라는 방식으로 반박해 왔다.
6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인 마오닝은 “이 문제는 온전히 미국산(産)”이라며 “미국은 스스로의 문제를 직시하고 자국 내 약물 규제 강화와 수요 통제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해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전문기관들은 중국이 펜타닐을 비롯한 마약 유통에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다고 분노한다. 중국 내 마약사범에 대해선 전 재산 몰수, 사형 등 초강도로 처벌하면서도 마약 원료의 불법 해외 반출에 대해선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펜타닐 징검다리 멕시코
펜타닐은 중국에서 원료를 생산하고 미국을 중독시킨다. 이때 한 차례 징검다리를 거쳐가는데, 바로 미국 남쪽의 멕시코다. 멕시코는 미국을 상대로 하는 마약 카르텔이 뿌리를 잡은 나라다. 이 멕시코에서 중국에서 들여온 원료를 펜타닐 알약 등으로 제조해 미국에 대규모로 반입시킨다.
멕시코 시날로아주 쿨리아칸에 위치한 펜타닐 알약 제조회사를 멕시코 군인들이 압수수색하고 있다. 로이터
지난 수십 년간 마약 문제를 놓고 멕시코는 미국에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달에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펜타닐 범람을 놓고 “미국의 가정 붕괴가 원인”이라며 미국 탓으로 돌렸다. 반면에 미국의 일부 강경파 공화당 의원들은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을 외국 테러 조직(FTO)으로 지정해 멕시코 내에 미군을 투입하자는 주장까지 내놨다.
하지만 이 같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역시 펜타닐 확산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멕시코 당국이 지난 11일 밝힌 펜타닐의 별명은 ‘차이나 화이트’ ‘중국 소녀’다. 이런 단어를 들으면 마약이니 조심하라고 국민들에게 알렸다. 펜타닐은 중국발임을 시사하며 사실상 미국 입장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멕시코를 펜타닐 전쟁의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FTO로 지정하는 것은 미국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이자 이웃인 멕시코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며 펜타닐 통제를 위한 미국의 외교정책 옵션 및 조치를 상당히 제한하고 방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중국을 향해서도 압박 대신 설득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중국을 ‘대마약정책 리더’로 인정하는 유화책을 통해 다자간 포럼으로 끌어내자는 것이다. 미‧중 패권 경쟁과 마약 문제를 분리하고 마약 문제에서만큼은 중국 정부를 고립시키기보다는 국제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 중국이 자기 입으로 마약에 대한 메시지를 내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