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아주 먼 여행길에 나선 여인의 장례미사가 있었다. 편안하게 잘 가시라는 인사를 못해서 내 마음이 우울하다. 솔직히 아프다.
뉴요커 멋쟁이 선배와 남부 촌사람인 나는 아픈 인연을 가졌다. 우리는 대학시절이나 한국에서 만난 적이 없다. 오래전 한국에 사는 선배가 대학신문사 대선배이니 인사하라고 소개해줘서 이메일로 인사하고 가끔 서로 안부를 나누었다. 그때 내가 막 한글로 글을 쓰기 시작한터라 수필가인 그 선배가 뉴욕 중앙일보에 글을 쓰는 것이 부러웠다. 훗날 나도 애틀랜타 중앙일보에 글을 싣게 되면서 서로 신문에 실린 글로 근황을 알면서 각자 바쁘게 살았다. 한번은 뉴욕 중앙일보에 선배의 글과 내 글이 함께 실려서 좋았다는 선배의 연락을 받고 내 키가 훌쩍 큰 듯이 나도 기뻤다.
그러다가 14년 전 봄이다. 그 선배가 알래스카 여행을 함께 하겠느냐고 물었을 적에 즉각 “예스” 했고 선배가 아는 뉴욕의 여행사를 통해서 크루즈와 내륙관광을 포함한 12일 여행패키지를 구했다. 그해 늦여름에 밴쿠버 공항에 도착해서 버스로 크루즈 터미널에 갔다. 승선절차를 마치고 지정된 방을 찾아가니 선배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낯선 지역에 대한 호기심과 크루즈에 흥분해서 배가 터미널을 떠날 적에 환호를 지르며 신이 났던 순간은 잠시였다. 막상 24시간 함께 보내면서 성품이 전혀 다른 두 여자는 서로에게 부담이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전혀 다른 생활을 했던 선배와 나는 예전의 한국인들이 아니었다.
뉴요커 선배는 이미 세상의 많은 멋진 곳을 두루 여행해서 알래스카의 풍광이 별로 특이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경이로웠다. 천연자연에 감정을 쏟아내는 나에게 점잖게 행동하라고 지적하는 바람에 나는 처음부터 기가 죽었다. 명품처럼 우아한 멋쟁이 선배는 한국과 뉴욕의 문학과 음악 등 예술분야 유명인들과 인연을 가진 저명인 이었다. 반면에 군대생활을 오래 했고 유명인 지인이 없는 나는 남부에 사는 보통 여자였다. 소소한 일에 마찰이 생기니 배 안에서나 내륙을 다니면서 다정하게 함께 즐기지 못하고 우리 두 사람은 대부분 따로 놀았다. 우리는 서로가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자신의 우주속에서 상대를 만났다가 크게 실망했다.
그 충격으로 몇 년 서로 외면하고 살다가 다시 찾아서 조심스럽게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갔다. 선배의 삶을 찬찬히 알게 되면서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자식을 위해 생활을 송두리채 헌신하면서 동시에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맹렬히 사는 모습은 내가 부러워하는 위대한 인간상이었다. 무엇을 하던 열정적이었던 수필가 이영주. 전통 환경과 관습을 극복하고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제 것으로 만든 여자. 그녀는 자신이 ‘안 트리오의 어머니’ 로 더 알려진 것을 자랑했다.
내가 남부의 명물 피칸을 보내면 선배는 몬태나주의 들판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소의 고기라 맛있다며 비프저키를 보내줬다. 그리고 내가 책을 낸다고 연락하니 선배는 기꺼이 축사를 써줬고 또 선배의 네트웍을 통해서 나를 한국문단에 등단 시켜 주셨다. 그녀의 방대한 문화 지식이 부러워 뉴욕을 알고 싶어서 나는 오랫동안 뉴요커 잡지를 구독했다. 매주, 뉴욕의 온갖 문화 소식을 다 접하면서 조금 뉴요커 선배를 닮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1 퍼센트 뉴요커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어쩌면 알래스카 기억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해서 서로 만나는 것을 피하고 그저 멀리서 각자 열심히 살자고 응원했는지 모른다. 해마다 연말이면 꼭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새해에 건강과 행복을 빌다가 2년 전인가 코비드 팬데믹이 끝나면 선배를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3월말에 뉴욕 선배가 내 의식에 자주 나타났다. 며칠 어수선해서 선배의 안부를 물었더니 병원에 입원중이란 대답에 깜짝 놀랐다. 기적을 체험했다며 곧 퇴원한다는 선배에게 차차 기적이야기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틀 후 나는 선배의 부고 소식을 받았다. 청천벽력의 소식에 한동안 휘청거렸다. 얼굴 보면서 진실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제 그 기회가 없음이 슬프다.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지만 매일 그녀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