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나면 ‘나만의 존재 이유’가 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이다. 그 존재 이유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까지를 위한 이타적인 것으로 확장될 때 아름다운 삶이 된다.
백선행 여사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평양의 이름 높은 교육사업가이자 사회사업가였다.
그녀는 1848년 (헌종 15년)에 가난한 농민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그녀는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 성상을 ‘백 과부’로 불렸다.
16세에 과부가 돼 친정으로 돌아왔다. 과부 모녀는 닥치는 대로 일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과부 모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10년을 하루 같이 살다 보니 150냥짜리 집 한 채와 현금이 1000냥 남짓 생겼다.
구차한 살림살이를 겨우 면했을 때, 어머니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백씨는 모친의 상여 뒤를 따를 상주 한 사람 없는 게 더 원통했다.
백씨는 조카뻘 되는 친척을 모친의 사후 양자로 입적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그러나 양자는 장례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모친의 유산에만 관심을 두었다. 양자는 아들인 자신이 모친의 전 재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씨는 모친과 함께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현금 1000냥을 양자에게 빼앗기고, 150냥짜리 집 한 채만 겨우 물려받았다.
백씨는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시 10년을 고생한 끝에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그때부터 백씨의 재산은 해가 다르게 불어났다. 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땅을 불려 나갔다.
백씨가 재산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사내가 그의 재산을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1900년 악명 높은 탐관오리 팽한주가 평양 부윤으로 부임했다.
그는 박구리에 사는 백 과부가 기백 석 추수의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죄 없는 백씨를 잡아다 하옥했다. 백씨에게 갖은 누명을 씌운 후, 재산을 바치면 풀어주겠노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백씨가 죽어도 재산은 바칠 수 없다고 버티자, 부윤은 10여 일 만에 그를 풀어주었다.
과부생활 45년 동안 앳되고 뽀얗던 얼굴은 강도에게 맞은 흉터와 깊게 팬 주름으로 거칠어졌지만, 끼니를 걱정하던 곤궁하던 살림살이는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나아졌다.
백씨는 환갑잔치도 하지 않고, 대동군 객산리 남편 묘소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씨는 객산리 마을에 들러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을 전했다. “나무다리를 허물고 돌다리를 놓아주겠소.”
객산리 나무다리는 낡고, 교각도 몹시 낮아 큰 비라도 내리면 물이 넘쳐 다리 구실을 못하기 일쑤였다. 백씨는 서울에서 석공기술자를 불러와서 넓고 튼튼한 석교를 놓았다. 객산교(客山橋)를 준공하기까지 든 3000원 남짓의 비용을 모두 백씨가 부담했다.
객산리 사람들은 백씨의 은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善行)’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백씨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백선행은 허튼 욕심 부리지 않고 매사에 신중했지만, 딱 한 번 교활한 거간에게 속아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1917년 백선행은 평양에서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강동군 만달산 부근의 토지가 좋다는 거간의 말만 믿은 채, 평당 7~8원을 주고 수천 평의 땅을 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석회질이 많아서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황무지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일본인이 그 지역에서 시멘트 원료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부근 토지를 모조리 평당 3~4원을 주고 매수했다. 백선행에게도 토지를 팔라고 매매 교섭을 했다.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2전 하던 땅값은 순식간에 100배가 올라 1~2원을 호가하더니 얼마 후 10~20원까지 뛰었다.
백씨가 꿈쩍도 하지 않자 일본인은 결국 평양 부윤을 찾아가 사정했다. 평양 부윤이 주선해 성사된 매매가격은 평당 70원. 백선행이 속아서 산 가격보다 10배나 비싼 값이었다. 이 거래 한 건으로 백선행의 재산은 30만원으로 불어나 평양 굴지의 대재산가로 올라섰다.
백선행은 한평생 학교는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다. 그래서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평양 시내 사립학교에 수십만원을 기부했다. 친지들이 돈을 그렇게 마구 쓰다간 얼마 못 버틴다고 충고할 때마다 백선행은 이렇게 말했다. “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쓰지 않으려면 돈은 모아서 뭐 하노.”
1928년까지 평양에는 조선인이 집회를 열 만한 공회당이 없었다. 부립공회당은 사실상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조만식, 오윤선이 백선행을 찾아가 조선인 중심의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뜻을 전하자 백선행은 흔쾌히 건립 자금을 내주었다.
백선행은 1933년 5월 8일 새벽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35만원(현재가치 3500억원)의 재산은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선행은 돈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지를 알려준 최초의 부자이자 과부였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수년 전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 실렸던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의 한 구절이다. 벌레 먹은 나뭇잎은 쓸모없게 된 나뭇잎이다. 구멍이 뚫린 나뭇잎이므로 나무에게도 사람에게도 별로 도움 될 게 없는 나뭇잎이다. 벌레가 먹고 남은 흔적이 흉하게 몸에 남아 있는 나뭇잎이다.
그런 나뭇잎을 시인은 예쁘다고 말한다. 시인은 나뭇잎이 제 몸에 상처가 생기는 걸 알면서 벌레를 먹여 살렸다고 생각한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떡갈나무 잎에 뚫린 구멍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엇을 남에게 베풀며 살아왔는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