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15)
나는 여덟 살에 어떤 아이였을까? 한국 나이로 여덟 살은 초등학교 일학년이다. 제 몸집만한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한 아이가 떠오른다. 작은 걸음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지고 걸어가야 하는 학교는 너무 멀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러서 겁도 많았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들도 많았다.
‘나는 여덟 살, 언덕을 가득 채우는 푸른 안개랑 그 짙은 냄새를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됐어요. 검은 물푸레나무가 자라는 곳도 찾아 낼 수 있답니다. 정말이지 여덟 살이면 적은 나이가 아닌 거예요.’ 이렇게 여덟 살을 말하는 한 아이가 있다.
〈Basket Moon〉 이 그림책에 나오는 소년은 고산지대에 산다. 곡식이나 야채 농사를 지을 수 없지만 바구니를 만들 검은 물푸레나무가 많이 자라는 마을에서 어른들은 바구니를 만들며 나무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어둠을 밝혀줄 바구니달, 즉 보름달이 뜰 때면 바구니를 어깨에 가득지고 도시 허드슨으로 나간다. 그곳에서 바구니를 팔아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어 오는 것이다. 도시가 궁금한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가고 싶지만 아직 어려서 안 된다는 말만 듣는다. 그래서 여덟 살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드디어 소년은 아홉 살 생일이 지나 도시에 나갈 수 있게 된다. 어른들이 만든 바구니와 함께 자신이 만든 바구니도 긴 장대에 매달고.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소년은 수많은 건물과 거리, 화려한 물건들, 여러 종류의 과일과 야채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도시 사람들이 ‘바구니밖에 모르는 산골짝 촌뜨기들’ 이라며 비웃는 말을 듣고 소년의 마음은 어두워지고 만다. 아버지는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더 이상 소년에게 바구니는 자랑거리가 아니다. 산골짝 촌뜨기들이나 하는 하찮은 일처럼 느껴진다. 소년은 바구니를 쌓아둔 창고에 들어가 정성스럽게 만든 바구니 더미를 걷어차 버린다. 그 때 조 아저씨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어떤 이들은 바람의 말을 배워서 음악으로 만들어 노래를 부르지.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바람의 말을 듣고 시를 쓴단다. 우리는 바람의 말로 바구니 짜는 법을 배웠지.”
한밤에 바람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간 소년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바람의 소리가 들려온다. 나무가 자라면 바구니들이 늘어나게 되고, 나무들이 키우는 것이 자신이 만들게 될 바구니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소년은 바람이 선택한 존재가 되기로 한다.
실제로 미국 뉴욕 허드슨에서 멀지 않은 컬럼비아 군 산악지대에는 바구니 만드는 일로 생계를 이어온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1950년대에 종이상자와 플라스틱 상자가 등장해서 나무로 만든 바구니가 팔리지 않게 되면서 그들이 살았던 마을도 바구니를 만들던 사람들도 사라졌단다. 이제 이런 바구니는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메리 린 레이는 박물관에서 일하며 미국 수공예를 연구하다가 바구니 만들기 역사책을 편집하며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전통을 보존하고픈 의지를 가진 연구자에게 소년이 전통을 이어 바구니를 만드는 일은 뛰어난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처럼 보였나 보다.
외부세계가 자기와 자기 가족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잘난체하는 도시사람들의 말은 무시하고 가난한 고산지대에서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려 노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기에 장인들이 가진 기술을 보존하려 무형 문화재를 지정하여 후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인을 세상 흐름에 따르지 않고 변화를 거부한 채 자기의 것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보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Chat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일상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인간의 지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신해서 머리를 쓰는 기술 앞에서 인간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 질문에 AI는 이미 답을 내놓았다. 이제 나만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