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슈 사이에 꽃을 곱게 펼쳐서 덮은 뒤 책 속에 넣었다. “어머나 요즘도 꽃을 말려요? 소녀 같아요.” 여고시절이 갑자기 생각 났다. 그때는 나뭇잎이랑 꽃잎들을 책 사이에 넣어서 많이 말렸다.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은 단골손님처럼 내 두꺼운 책 사이로 들어와서 잠을 잤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손편지를 많이 썼다. 멀리 사시는 작은 아버지께 안부편지를,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이사간 짝지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우리집 옆방에 하숙했던 언니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줬다. 잘 말려진 잎을 골라서 편지지에 끼우거나 예쁜 시를 옮겨 쓰고,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도 함께 보냈다. 마른 꽃잎으로 액자를 만들고, 책갈피를 만들어 친구에게 나눠 줬던 추억들을 떠올리니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감성이 분홍빛 그리움으로 피어나니 마음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여고시절 책갈피 속의 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여인의 넓은 집 안팎에는 꽃들이 가득하다. 그녀는 요즘 나에게 그림 지도를 받는다. 꽃이 좋아서 꽃 그림만 그린다는 그녀는 수줍은 소녀 같다. 꽃과 사랑을 나누는 그녀의 감성이 꽃만 그리게 하나보다.
작은 씨에서 싹이 나오고, 잎과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고 행복해진다는 말에 공감했다. 들꽃이 눈에 들어오고 예뻐 보이면 늙어가는 증거라고 했다. 그녀와 나는 나이 들고 흰머리와 주름살이 늘어나서 우울할 때도 있지만 더 값진 것들을 많이 얻기에 나이 든다는 것이 싫지 않다.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 가는 거라며 웃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대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특히 기초가 탄탄하지 않은 사람은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꽃밭을 그리려면 꽃들의 전체적인 모양을 살펴보며 어떤 종류의 꽃인지, 꽃잎이 몇 개 인지, 잎은 어떻게 생겼는지, 꽃의 형태를 파악하고 기본적인 구조를 알아야 한다. 햇살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서 다양한 색이 보이는 것도 느껴야 하며 그림자가 어디로 생기는지도 살펴야 한다. 뿌리에서부터 줄기를 타고 올라와 퍼져 나가는 가지들을 잘 잡아서 그 가지에 붙어있는 잎들과 꽃들이 따로 분리되지 않게 그려야 자연스러운 꽃밭이 된다.
실물을 보고 그린 그림은 전해주는 느낌이 다르다. 사진을 보고 그리면 내가 그 꽃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진다. 사진만 열심히 찍어서 보이는 대로 그리면 건조하고 살아있는 색을 찾을 수 없다.
뒤뜰에 핀 꽃을 사진 찍어서 그리는 그녀에게 나가서 꽃을 살펴보라고 했더니 두 송이 꺾어 왔다. 어머나! 꽃잎이 겹쳐진 게 아니라 리본모양으로 붙어 있네요. 참 특이하게 생겼어요. 꽃과 잎과 줄기를 관찰하며 그림을 수정했다. 이렇게 꽃을 직접 살펴보고 그리니 훨씬 이해가 돼요, 시작은 했지만 막막함에 포기하고 싶었는데 정말 좋아졌다며 이제는 하나하나 열심히 관찰하겠다고 해서 그리고 싶은 것을 연필로 스케치하며 연습을 많이 하라고 일러줬다.
나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이 나이에 무슨 그림을, 하는 마음에 망설였던 그녀가 꽃을 그리면서 또 다른 행복감에 시작을 잘 했다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하나, 둘 늘어나는 꽃그림으로 집 안 곳곳의 벽면을 장식하며 만든 그녀만의 꽃밭을 흐뭇하고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해맑아 보였다.
조금씩 실력이 쌓이고 그림에 대한 애정을 가지면 또 다른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과 사랑을 담아서 그리다 보면 그녀의 감정까지 그림속에 묻어 나오는 것도 느끼게 될 것이다. 특히 꽃 그림이나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전달하고 싶을 때는 보고 그리는 것에 작가의 느낌을 잘 살려서 그려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하는 그녀, 수업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며 표현하고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그녀의 그림처럼 꽃밭이 된 듯했다.
수업이 끝날 때쯤 작은 보라색 꽃은 시들어 있었다. 나는 티슈 사이에 꽃을 곱게 펼쳐서 덮은 뒤 책 속에 넣었다. 어머나! 요즘도 꽃을 말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