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독일로 출장 갔던 딸이 보낸 남부 바바리아의 작은 마을 사진이 내 속에 불꽃을 피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꽃은 조금씩 전신으로 번지고 있다. 내 사춘기와 청년기를 송두리째 불태웠던 독일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내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나 보다.
그러다가 어머니날에 목공예로 유명한 오버아머가우 작은 마을의 장인이 칼로 정성 들여 다듬은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목공예를 선물 받자 독일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일었다. 내 젊은 시절을 송두리채 지배했던 독일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었다.
오버아머가우는 남부 바바리아 지역에 있는 인구 5천명이 조금 넘는 작은 마을이다. 예전에 독일에 살면서 그곳을 찾아서 감탄사를 쏟아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근 40년 전의 일이다. 어느 사이에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가 버린 건가.
거리 곳곳에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집들이 많았다. 지역 전설과 그림동화의 스토리나 종교적인 장면의 프레스코화가 평범한 건물을 독특하게 만들어 마치 동화의 나라 같아서 나도 발걸음을 멈추고 동심으로 돌아갔었다.
특히 오버아머가우는1634년에 초연한 후부터 10년에 한번 순전히 마을사람들에 의해서 Passion Play를 무대에 올린다. 이 공연은 2천여명의 마을사람들이 참여하는 마을 전체의 대행사다. 이곳의 그리스도의 수난극은 세상에 알려져서 이제는 공연 때 전세계에서 수십만의 관광객이 모여든다.
10년마다 일어나는 이곳의 대행사는 내가 독일에 살았던 3년 동안은 공연이 없었던 탓에 나는 빈 공연장을 보고 상상만 했었다. 그후에도 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독일에 살면서 자주 방문한 곳은 하이델베르크이다. 내 어린시절 꿈의 도시였던 그 낭만적인 도시는 나를 문학소녀로 만들었고 나는 젊은 대학생들의 활기를 나누어 받으며 마치 나도 그들의 하나인양 활개치고 다니며 객기를 부렸었다.
그리고 폐허가 된 고성 하이델베르크 뜰에서 여름 저녁에 본 연극 ‘황태자의 첫사랑’ 도 나를 충분히 흥분시켰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 온 황태자 칼 하인리히와 그가 묵던 여관의 하녀 캐티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 서늘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더불어 해마다 12월31일 자정에 고성 맞은편 철학가의 길에서 숨죽이고 지켜본 고성에서 올리는 불꽃놀이는 정말 장관이었다. 도시의 모든 불이 잠시 꺼지고 하늘로 오른 불꽃이 넥카 강물에 출렁이면 그 순간적인 절경에 가슴이 꽉 막히고 눈물이 났었다. 독일의 많은 아름다운 지역들 중 나를 사로잡은 도시는 단연 하이델베르크였다.
독일에 살면서 찾아간 곳들이 많았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산뜻한 괴테하우스에서 그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방에서 느꼈던 전율은 나에게 창작의 충동을 주었고 베토벤의 생가에서는 영혼을 울리는 멜로디에 휘감겼다.
넥카 강변 마르바하에서 찾은 ‘빌헬름 텔’의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집에서는 화살로 사과 쏘기가 떠올라 슬쩍 한발짝 물러서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의 생가 칼프의 산뜻하고 고요한 거리를 다니면서 문학이라는 대어를 낚은 헤세의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들처럼 나에게 독일사랑을 유도한 작가 루이제 린저. 그녀의 소설 ‘삶의 한가운데’가 고교시절 나에게 준 강한 충격은 내 삶에 많은 변수로 작용했다. 어쩌면 대학시절 성공과 부의 척도로 여기던 KS 마크를 가진 남자친구를 떠난 것이나 미국 와서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군에 입대하는 결정을 내린 것은 그 영향인지 모른다.
내가 살면서 내린 많은 선택은 나를 위한 생을 만들려한 노력이었다. 그리고 훗날 내가 딸을 낳았을 적에 나는 단번에 그 소설의 주인공 이름으로 딸을 불렀다. 어떤 상황에도 용기를 잃지 말고 생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면서.
2019년, 남편과 독일로 추억여행을 갔었다. 우리가 만났던 슈투트가르트를 포함해서 그곳에 살면서 즐겨 찾아갔던 지역들을 둘러봤다. 아무리 많은 햇수가 지났어도 어디를 가든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지나간 세월을 잊어서 너무 좋았다.
오늘은 내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하이네의 시 ‘아름다운 오월에’ 를 슈만이 작곡한 노래를 들으면서 지나간 세월과 또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는데 갑자기 괴테와 실러, 헤세와 린저, 베토벤과 슈만이 손을 내민다. 독일은 다시 나를 유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