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는 동물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자식 생각하는 마음은 똑같다. 아니, 어쩌면 동물들이 더 모성애가 강할지도 모른다.
문어는 무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머리가 좋다. 문어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경험을 기억하였다가 다음번에 비슷한 문제가 생기면 이를 이용해 해결한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월드컵 때 무려 8 경기에서 어느 나라가 이길지 모두 맞춰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문어가 있었다. 바로 독일의 한 수족관에 살았던 ‘점쟁이 문어’파울(Paul)이다. 4강에서 강적 스페인을 만난 독일은, 파울이 독일의 패배를 예언하자 “해산물 샐러드에 넣어버리겠다”며 ‘살해협박'(?)을 했다.
그런데 남아공 월드컵 우승국인 스페인은, 경우가 달랐다. 자국 축구대표팀의 승리 결과를 미리 예견해준 고마운 점쟁이 파울에게 스페인 명예시민권을 수여함으써 그 은혜에 보답했다.
문어는 개에 버금가는 아이큐를 지닌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사육사를 인지하고, 플라스틱 통 뚜껑을 돌려 열고 탈출하기도 한다. 문어(文魚)라는 이름에 글을 뜻하는 문(文)자가 들어간 것이 우연은 아닐 듯싶다.
우리 선조들은 문어가 지닌 먹물 때문에 글을 아는 물고기라고 귀하게 여겼다. 문어의 먹물은 선비들이 글을 쓸 때 이용하기도 했다, 머리가 크면 머리가 좋을 거란 속설이 있다.
문어의 머리가 커서 지능이 높을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문어의 머리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머리가 아니라 몸통이다. 이 때문에 강원도나 경북지방에서는 제사상에 반드시 올라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문어는 머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모성애 또한 뛰어나다. 문어는 살신부화(殺身孵化)로 유명하다. 어미 문어는 산란기가 되면 바위 밑 같은 곳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 뒤 알을 낳고 그 알들이 부화될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버티며 알을 보호한다. 그 기간이 보통 여섯 달이다.
인간은 일주일 이상을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심해문어 중 하나가 자그마치 53개월이나 알을 품었고, 부화하자 죽었다. 어미 문어는 포란기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새끼들이 태어나면 어미는 죽는다. 그 새끼들의 첫 먹이가 제 어미의 살이다.
그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통해 첫 교육이자 마지막 교육을 받는다. 너희들도 네 새끼를 위해서 네 몸을 이렇게 내놔야 한다고. 그래서 새끼들도 자라나 어른이 되면 제 어미가 한 그대로 자신의 몸을 바친다.
어느 스쿠버다이버가 들려준 또 다른 문어의 모성애 일화다. 잠수 중에 바위틈에 있는 문어를 발견하고는 잡으려고 다리를 잡아끌었단다. 그러나 문어가 도망가지 않고 버티자 칼로 다리 하나를 잘랐는데 그래도 꿈적 안하고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 사투 끝에 다리가 여럿 잘린 문어가 바위틈에서 끌려 나왔는데 그곳에는 문어 알이 가득 붙어있었다. 알을 보호하려고 어미 문어가 끝까지 버텼던 것이다. 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인간사회를 둘러보면 문어만도 못한 사람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비닐 팩에 꽁꽁 싸여 마트 진열대에 올라있는 검붉은 문어의 조각난 몸통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이 영험하고 신성한 존재를 이렇게 씹어 삼켜도 되는 것인가. 숨진 문어의 넋들이 구천 위를 떠돌면서 자신들의 육체가 한낱 미물 인간에게 배설·소화되는 장면을 피울음을 울며 바라보는 건 아닐지…
“우리 집 처마 밑에 새끼친 딱새. 공부하다 보면 딱새 엄마가 둥지로 들어갈 때도 뭔가 주둥이에 물고 가고. 나올 때도 주둥이에 뭔가 물고 나온다. 들어갈 때는 먹이를 물고 가고 나올 때는 새끼새 똥을 물고 나오는 거란다. 엄마가 일러주시는 말씀. 아 그렇구나. 엄마 새도 새끼새 기저귀를 그렇게 갈아주는 거구나.” 나태주 시인의‘새집 관찰’이다.
동물의 모성애는 내 주변에서도 목격되었다. 달포 전이었다. 내가 출석하는 시니어센터에 진기한 손님 하나가 찾아왔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건물 현관 앞 잔디밭에 당당하게(?)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앉은 것이다. 애틀랜타에는 조용한 숲도 많으데 왜 하필 소란스러운 건물 현관 앞에 둥지를 틀었을까. 사람들이 신기해서 다가가도 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진기한 손님의 안부는 곧 센터 노인들의 주요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머지 않아 귀여운 새끼 오리들이 엄마와 함께 뒤뚱뒤뚱 산책하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는 기대 속에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부화 소식이 없는 것이다. 알고 보니 품고 있는 알이 모두 무정란이었다. 하지만 청둥오리는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은 따뜻한 둥지를 만들라고 검불도 갖다 놓고 먹을 것도 날라도 주었다. 처음에 올 때 토실토실하던 모습은 점점 까칠해졌다. 이제 인간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안부가 걱정되었다. 둥지는 무사할까? 그런데 며칠 전부터 청둥오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품고 있어봐야 부질없는 일이란 것을 알았을까. 둥지 앞에는 스티로폴 먹이그릇만 뎅그러니 남아 있었다. 마음이 찡했다.
며칠 후 다시 찾아가 보니 이것마저 모두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청둥오리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손님은 떠나간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유산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자연의 품에서 어서 기력을 회복하여 힘차게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래, 다음에는 건강한 알을 낳아 잘 부화하거라.’
그렇다. 두려움, 슬픔, 그리움 등의 감정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성애는 결코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동물도 자식을 위한 사랑은 사람 못지않다. 모성애가 가진 애절한 사랑의 힘, 그만큼 사람과 동물이라는 경계마저 허무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모성애가 시들면 지구도 시든다’는 어느 시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